<창조> 동인의 예술관과 이광수
김동인이 주요한, 전영택, 김환, 최승만 등의 동인들과 동경에서 조선 최초의 문예지 <창조>를 창간한 것은 1919년 2월 1일의 일이다. <창조>의 경향을 특정한 문예사조에 견주어 평가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창조>에 실린 글을 통해 구체적으로 소개되거나 혹은 긍정적으로 언급된 서구 및 일본의 작가들을 살펴보면 셰익스피어와 괴테에서 시작하여 랭보, 베를렌느, 보들레르, 모파상, 투르게네프와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타고르, 오스카 와일드, 입센과 졸라, 시마자키 도오손과 아리시마 다케오 등 근대의 내노라하는 시인과 소설가들을 거의 모두 망라하고 있다. 개항 이후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급속하게 서구를 모델로 삼은 근대화에 접근해나갔던 상황에서 서구의 제사조의 동시적인 수용과 혼류의 양상을 보였던 것은 중국과 일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장르분화가 명확하지 않고 비평용어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담론 속에서 특정한 개념을 근거로 논자들의 인식의 변화를 읽어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다양한 편차에도 불구하고 <창조>의 동인들이 가졌던 기본적인 전제는 자신들의 과업이란 “조선의 문예부흥”을 위한 “신문화운동”이라는 것이었다. 선진 문화에 대한 열광, 그리고 문예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문화의 불모지 조선에 대한 통탄은 <창조>의 동인들의 글이라면 어디에나 등장하는 일종의 후렴구와 같았다. <창조> 창간호의 편집후기에 등장하는 주요한의 발언에는 선진 문화를 이해하고 조선의 문화를 선도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도가의 반응을 미리 앞지르려는 두려움이 함께 뒤엉켜 있다.
<창조>의 창간호에서 엿보이는 이상주의적 열기는 잡지의 창간 시점이 3ㆍ1 운동 전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을 세계가 떠들썩할 무렵이었고 당시의 동경에서 프랑스와 러시아문학을 논하면서 문학열이 최고조에 달했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2호에 게재된 최승만의 <르네싼스>, 3호에 실린 김환의 <미술론>을 비록하여 <창조>에 실린 평론들은 조선에 문예에 대한 선진이론을 소개하고 새로운 문예의 개념 아래서 과거 조선 사회에서 홀시 되어온 문예를 재평가함으로써 다시 구제하려는 조선문예부흥의 기획에 바쳐지고 있다. 2호 발간 후 상해에 간 주요한이 동경의 <창조>의 동인들에게 보낸 편지형식의 글들인 <장강 어구에서>는 동인들간의 결속을 재확인하고 국민문학의 건설을 거듭 다짐하는 다소 감상적인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이렇게 동일한 민족구성원으로서 문화적 동질성을 확인하려는 기획과 근대인의 조건과 서구의 문예의 개념을 소개하려는 기획은 때로 서로 상충되어 불안정하게 보인다. 미술작품이란 “世上(세상)에서 엇한 利用(이용)에던지 動(동)하지 안코 美(미)하고도 快(쾌)하며 는 超世的(초세적)우용의 우각을 惹起(야기)하는” 것이라는 정의로 시작하는 김환의 <미술론>의 서문은 “잘 때가 아니요 깰 때가 되었”고 “우리도 남과가치 文明(문명)한 生活(생활) 2” 해야겠다는 전형적인 계몽기적 언설의 연장선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기획이 명게 분화된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창조> 8호에 이르러서이다. 김찬영의 <현대예술의 대안에서-회화에 표현된 ‘포스트푸레쓔니즘’과 ‘큐비즘’>은 실제로 당대의 동경 유학생들이 예술을 통해서 무엇을 구하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미란 사람의 감정에 불러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에 대상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감상자의 주관에 근거하는 것이고 현대예술은 한마디로 자기표현이라고 쓰고 있다. 그런데 이 글은 입체파와후기 인상파의 예술작품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보다도 예술가들의 일화를 통해서 예술가적인 행위양식에 대한 논의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김찬영은 유독 사회의 몰이해를 강조하면서 이에 맞서 예술가들이 시간적, 공간적, 사회적, 국민적, 인습적 모든 실생활에서 벗어난 “赤裸(적나)한 自己(자기) 3
이와 대조적으로 역시 8호에 실린 이광수의 글 <文士(문사)와 修養(수양)>은 동경에서 온 데카당스에 무분별하게 젖은 조선청년문사들을 비난하고 있다. 이광수가 직시한 것 역시 예술작품 자체보다도 예술가적인 행위양식을 먼저 구하는 청년들의 모습이었다. 그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조선의 구체적인 시공간 내에서 예술을 위한 예술이 과연 적절한 개념이 될수 있는가 회의하는 것이다.
이광수는 조선에서 예술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면 유용한 것이 아니면 무용한 것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이광수가 “예술을 위한 예술”을 “생을 위한 예술”과 대비시킬 때 여기에서 생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우리 민족의 생”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광수는 서두에서부터 문예를 한 국가를 대표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문예 고유의 선전능력을 강조하며 논의를 시작한다. 그에게 식민지 조선의 문예란 민족구성원의 사유와 경험을 동질화하고 표상하는 형식으로서 기능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광수는 “우리 민족의 심적조류는 진실로 Tablo Rossa"라고 규정하고 문단에 유행하는 데카당스의 조류를 건전한 생활방식에서 벗어난 ”도덕적 악마성“으로 보고 비판하고 있다. 이과우가 예술창작보다는 예술가의 자세에 관심을 보이는 문사지망생들을 비판한 것은 정당했지만 그의 글 역시 문사의 개념에 걸맞는 도덕적 태도를 추상적 일반론을 통해 전개하는 데 머물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창조> 9호에서 동경의 독자인 정영태로부터 추상적이고 예술에 몰이해한 논의로 일관했다는 반론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동경의 독자가 분노한 것은 독일의 표현주의와 같은 세계적 문화조류를 외면한 이광수의 시대착오보다도 ”文(문)은 人(인)이라는 말에서 불거지는 전근대적인 인격주의와 권위적인 담론방식이었다. 주요한과 이광수를 비롯하여 <창조>에 참여한 일단의 동인들 혹은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이루어진 문학예술에 대한 논의는 어기까지나 “신문화운동”-조선을 문화적 불모지로 규정하고 조선 문화의 지평을 일거에 세계적인 수준으로 높여야 한다는 기본 전제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광염소나타>에서 예술가의 사회적 위치를 놓고 벌어지는 대화와 예술가와 사회교화자가 아니라 예술비평가와 사회교화자 사이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예술가에 대한 관점의 분화는 “전심력을 다야 신문화를 건설”한다는 유학생 출신 지식인들의 근대화 기획 내에서 이루어진 분화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동인의 <약한 자의 슬픔>을 위시하여 <창조>에 실린 대부분의 소설들이 신구 세대간의 행위양식의 차이로 말미암은 갈등을 그리고 있는 것처럼 근본적인 문제는 문예 자체가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다시 정립하고 새로운 행위양식을 구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문학 수업을 위한 자료로 활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