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퉁푸퉁 타이완 마지막날(08/08) 여행기 - 태풍 사우르델론
1. 사우르델론이 왔다. 심각했다.
저녁에도 숙소 창문을 때리던 빗소리는 눈을 뜬 아침까지 이어졌다.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던 나는 창문에 대고 감성샷 따위나 찍고 있었다.
감성샷 <하늘에도 눈물이..>
마지막날의 계획은 호텔 조식으로 아침을 일찍 먹고 고궁박물원에 가는 것이었다. 비도 내리니, 1. 일찍 체크아웃하고, 2. 캐리어와 짐은 모두 타이베이 메인 스테이션 코인 락커에 넣어두고, 3. 맨몸으로 고궁 박물원 개장 시간에 맞춰 들어가서 몇 시간 잘 보내고, 4. 고궁박물원 식당에서 점심 먹고, 5. 타이베이 메인 스테이션에서 HSR 타고 타오위안 공항으로 가고, 6. 공항 라운지에서 탑승 시간 16:00까지 느긋하게 책 읽다가 7. 귀국하는 것. 완벽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어서와, 일본의 보호가 없는 태풍은 처음이지?
아침 먹으러 내려간 1층에서 본 태풍의 위엄은 상상을 초월했다. 본래 비라는 것은 하늘에서 지면으로 수직으로 내리는 것이다. 바람이 불면 수직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하늘에서 내리는 것엔 변함이 없다. 근데... 비가 지면과 수평으로 내리고 있었다. (-_-;) 그것도 앞이 안개 낀 것처럼 뿌옇게 보이게... 호텔 입구에서 걱정스레 밖을 바라보는 중국인들 옆에 나도 서서 걱정스레 밖을 바라봤다. 그래도... 아직 고궁박물원을 갈 수 있다고 믿고 있던 때였다.
바람에 공원 간판, 넘어지다
그런데 갑자기 불어온 강풍에 길 건너편 공원 표지판이 넘어진다! 중국인들이 놀라서 자기들끼리 뭐라뭐라 소리친다. 나도 놀라서 눈만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오토바이, 하늘을 날다.
난 봤다. 오토바이가 하늘을 날았다...길 건너편 쓰러진 오토바이, 본래 다른 오토아비와 나란히 서 있던 녀석이다. 근데 저 녀석이 갑자기 바람에 살짝 뜨더니 부왕~~ 날아가서 자전거를 박살내더란 말이다.
사태가 심상치 않았다. 지켜보던 중국인들은 놀라서 소리지르기 시작했고, 난 로비로 갔다. 당황스러운 일이 생기면 머리가 맑아지는 것이 내 장점 아니던가? 로비 직원에서 내 비행편이 16시에 이륙할 수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했다. 직원은 인터넷을 확인하더니, 오전 비행기는 모두 취소되었고 16시 비행기는 17시 20분으로 이륙 시간이 변경되었다고 알려줬다. 다행히 내 비행기는 뜬단다. 안도감에 일단 밥부터 먹자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을 먹으며 오늘 일정을 변경했다. 고궁박물원까지 가는 동안 버스를 기다릴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타이베이 101 빌딩쪽으로 가서 타이베이 101 쇼핑 센터와 백화점을 둘러보기로 일정을 변경했다. 그곳들은 모두 지하도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2. 젊음의 거리, 태풍에 박살나다.
태풍 사우르델론. 우리나라를 강타했던 매미급의 1.5배가 되어 대만 열도를 강타. 한국에 돌아와 검색한 결과다. 문자로 옮기면 그 위력이 얼마인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태풍 사우르델론. 정말 강력했다.
아침을 먹고 호텔을 나서자마자 편의점에서 우의를 사서 입었다. 캐리어에도 방수포를 두르고 길을 나섰다. 태풍 바람에 내 몸이 뒤로 밀린다. 가게 간판이 떨어지는 걸 봤다. 어제 저녁까진 넘실대던 젊음의 거리는 온데간데 없고 태풍의 피해만 보였다. 그리고 난 그 빗속을 뚫고 있었다. 그래, 이제와서 생각하니 내가 미친 놈이었다.
시먼띵 길거리에 버려진 우산들. 사우르델론 앞에서 우산은 무용지물이었다.
소니 간판 떨어진 거 봤어? 난 봤어.
가게 간판 떨어지는 거 봤어? 난 봤어.
해(日) 떨어지는 거 봤어? 난 봤어.
사람은 없고 부서진 간판 잔해들만 가득...
3. 텅 빈 타이베이 메인 스테이션. 살아서 공항부터 가자!
타이베이 메인 스테이션은 여행 다니는 3일 동안 늘 붐비던 곳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 가득한 타이베이 역은 도대체 어디갔단 말인가? 중앙 광장에도 사람은 없었고, 문을 연 가게도 없었다. 타이베이 역은 모든 것이 텅 비어버렸다. 공항 지하도 여기저기에 물이 고여 있었고, 모든 기차는 운행이 취소된 상황. 역 입구 간판이 떨어져 동서남북 출입구 모두 출입이 통제된 상황.
이제야 공포가 밀려왔다. 쇼핑이 문제가 아니라, 살아서 공항까지 갈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HSR 매표원에게 언제 HSR이 출발할 수 있느냐 물으니 오늘은 운행 계획이 없단다. 타오위안 공항으로 가려면 버스를 이용하란다. 타이베이 메인 버스 스테이션! 찾아야 했다!
이 거대한 타이베이 역에 사람이라곤 경찰, 노숙자, 청소부 뿐이었다.
타이베이 역은 넓고 복잡하다. 지상으로 나가기엔 모든 출입문이 통제된 상황이고, 나갈 엄두도 이젠 나지 않았다. 지하도로 타이베이 버스 정류장을 찾는데 꼬박 두 시간이 걸렸다. 힘든 길찾기였다. 하지만 고백컨대, 이 상황이 짜증나거나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것마저도 재미있었다. 태풍에 내 계획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도 재미있었고, 살면서 두번째 보는 태풍의 위력도 재미있었고, 길을 못 찾아 마주치는 경찰마다 붙잡고 길을 묻는 것도 재미있었고, 한국에서 친구들이 걱정스런 카톡을 보내오는 것도 재미있었다.
그래, 나는 대만의 매력에 빠져있었다.
버스를 타고 안도감에 찍은 사진
한참을 헤매고 찾은 타이베이 버스 정류장. (여기서 꿀팁! 타이베이 역에서 타이베이 버스 정류장으로 가려면, Y8구역에서 Z12 출구로 나가면 된다. 타이베이 역에서 마주친 경찰이 알려준 꿀팁!) 버스정류장은 이미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가득차 있었다. 한 버스에 40명씩 탄다고 생각해도 나는 세네번째 버스에나 탈 인원이었다. 하지만 유도리 넘치는 대만인들은 타오위안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배차간격 무시하고 한꺼번에 네 대를 출발시켰다. 덕분에 20분 정도 기다려서 나도 버스에 탈 수 있었다. 이제야 긴장이 풀린 나는 버스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그리고 하늘의 빗방울도 서서히 그치고 있었다.
4. All Flight Cancle
타오위안 공항에서 본 풍경은 "아, 전쟁나서 피난가면 이런 느낌이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모습이었다. 전날 저녁부터 모든 비행이 취소되면서 타오위안 공항을 갈 곳 잃은 사람들로 아비규환이었다.
전 항공편 취소의 위엄!
태풍 영향으로 대부분의 항공편이 취소되었습니다. 지상 직원에게 문의하세요.
아비규환의 타오위안 공항
거의 모든 메뉴가 품절인 상황에서 겨우 건진 점심 식사
지상 직원에게 문의한 결과 내 비행기는 기상 상황이 나아지는 17시 20분에 뜬다고 한다. 안도감이 밀려오자 이젠 허기가 밀려와 공항 식당가로 내려갔다. 그곳도 아비규환이 펼쳐져 있었다. 대부분의 식당 메뉴가 품절인 상황. 겨우겨우 품절되지 않은 메뉴를 찾아 주문해 허기를 채웠다. 하지만 닭고기는 너무 기름졌고, 결국 밥과 죽순, 볶은 채소로 배를 채웠다.
밥을 먹고도 발권 시간인 세 시까진 두시간이 남은 상황. 결국 공항 광고판 위에 미국인들과 앉아서 책을 읽었다.
세 시 발권 시작. 공항 모든 항공사 카운터 다시 아비규환
세 시가 되자 모든 항공사 카운터에서 일제히 결항편과 지연편에 대한 발권이 시작되었다. 한 시간을 기다려서야 겨우 내 항공편에 대한 발권을 받을 수 있었다. 지루한 출국 수속까지 마치고 면세점에 들러 가진 돈을 탈탈 털어 사람들에게 줄 선물로 펑리수와 인스턴트 밀크티를 샀다. 그리고 나를 위한 마지막 열대 과일 주스 한 캔.
타이완의 마지막 맛
태풍 지연으로 인한 특별편
타이완에 올 때완 다르게 돌아갈 땐 두 타임의 승객이 함께 탑승했다. 그 결과 대형기를 타게 되었다. 처음 타보는 대형기가 신기해서 사진 하나 찰칵.
서서히 비가 그치는 타이완
비행기 창 밖엔 이제 비가 그치고 있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했고, 이제 일상으로 돌아올 때가 되었다.
5. 추억하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타이완은 보름 전의 일이 되었다. 그러나 보름이 지나고도 아직 타이완이 떠오르고, 뒤늦은 장맛비에 계속 타이완이 떠오른다. 정말 매력적인 나라. 중국과 일본과 한국과 동남아가 공존하는 나라. 사람들이 친절한 나라. 태풍의 나라. 만남의 나라. 다시 한번 타이완을 갈 것을 다짐하며, 난 오늘도 일상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