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읽기

단편소설 <담배> 2부

영혼의환 2010. 4. 25. 00:47

침대에 누운 그녀는 쉬 잠들어 버렸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잠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밖으로 나섰다. 그림자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늘어나 있었다. 난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입에선 담배가 떠날 생각을 않았다. 무슨 생각인지 계속 담배만 떠올랐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박물관이었다. 박물관에선 ‘인체의 무한한 신비! 세계 순회전’이 한창이었다. 난 무작정 표를 사 안으로 들어갔다. 담배가 아닌 다른 것을 생각하고 싶었다.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담배만 아니라면, 담배만 생각나지 않게 한다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나마저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았다.

폐관 때가 다 되가는 전시관은 시끌시끌했다. 견학 나온 유치원생들이 교사를 따라 전시관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노랗고 하얀 체육복을 입은 아이들은 병아리새끼들 마냥 종알종알 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화살표가 이끄는 대로 전시관을 돌아다녔다. 아인슈타인의 뇌, 핏줄만 보이는 사내 모형의 마네킹, 가슴이 절단된 여자. 뼈만 남은 뼈, 방부 처리된 심장. 인간이 이렇게 징그러운 모습인가. 난 새삼 징그러운 것들이 내 몸 속에 있다는 사실에 부르르 떨었다. 내 안은 추하구나.

전시장 한 편엔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것들 예닐곱 개가 아크릴 통에 각각 담겨 통 안에서 떠다니고 있었다. 첫 상자에는 검은 콩 같은 것이 상자 안에 떠 있었다. 다음 상자에서 콩은 조금 커져 있었고 색이 연해졌다. 다음 상자엔 콩은 온데간데없고 작은 해마 한 마리가 감겨 있었다. 해마는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점점 커지고 있었다. 해마는 머리가 커지고 있었다. 입만 보이던 얼굴은 조금씩 눈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눈이 나타나면서 귀가 나타난다. 물갈퀴 같던 손이, 손가락 마디마디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꼬리가 사라지고 다리가 드러난다. 아기다. 콩알은 어느새 새하얀 아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크릴 상자 속 식염수가 제 어미의 자궁이라도 되는 듯 아기는 웅크려 잠들어 있다. 아기는 어미의 사랑이 끊어진 줄 아는지 모르는지 감은 눈을 뜰 줄 몰랐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생명의 신비. 이 태아들은 자궁 속에서 유산된 태아들로서…….

난 잠든 아시 옆의 설명문을 낮게 읊조렸다. 생명의 신비. 난 화살표를 거슬러 최초의 콩 앞으로 간다. 콩이 담긴 아크릴 통 아래엔 '3주차'라는 고딕체 글시가 선명하다. 검붉은 콩은 그녀의 자궁 속을 유유히 떠다닌다. 다시 찬찬히 화살표를 따라간다. 콩은 손바닥이 생기고 귀가 생기고 눈이 새겨진다. 다리가 생기고 손마디가 갈라진다. 눈이 선명해지고 코가 오똑하다. 불안해 보이던 콩은 어느새 주의 얼굴을 닮은 여자아이가 되어 주의 자궁 속에서 잠들어 있다. 통통한 다리가 금세 주의 배를 걷어 찰 것만 같다. 아기는 주를 닮아 있다.

아크릴 상자에 귀를 대 본다. 아기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린다. 콩닥콩닥.

탯줄을 따라 아기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주의 뱃속에서, 아기가, 내 딸이, 주의 딸이, 우리의 딸이 옹알이 한다.

아빠. 아파!

화들짝 놀라 귀를 뗀다. 저 편에서 꼬마 여자아이가 넘어져 울고 있다. 한 남자가 아이를 일으켜 세워 달래준다. 아크릴 상자 속 태아를 바라본다. 금세 눈을 뜨고 날 노려 볼 것만 같다.

아빠. 아파!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시장을 뛰어나갔다. 전시장 밖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신경질적으로 라이터 부싯돌을 당겼다. 담배에 불은 붙지 않고 부싯돌은 헛돌았다. 겨우겨우 담배에 불을 붙이고 담배를 빨아 당겼다. 미친 듯 담배를 빨아 당겼다. 빨간 담뱃불과 재가 뒤섞인 담배 끝은 주의 자궁 속 아기를 닮아 있다. 아이는 살아있다. 콩알 같은 아이는 살아있다. 아이는 조금씩, 조금씩 나에게 다가온다. 아이의 심장이 뛰기 시작하고 발길질을 시작한다.

아빠!

아이의 옹알이에 난 놀라 담배를 땅바닥에 던져버렸다. 담배는 꺼지지 않고 계속 타들어 간다. 아이의 생명만큼이나 질긴 담배는 바람에 또로록 굴러다닌다. 담배를 짓이겨 밟아 버리지만 불똥이 바람에 휘날린다.

아빠! 아빠!

아파…… 아파…….

아이의 옹알이와 주의 고통스러운 마디마디 흐느끼는 목소리가 내 귓속을 울린다.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선 담배가 필요했다. 아니, 둘의 고통을 함께 느끼기 위해선 담배가 필요했다. 아니, 둘 모두를 위해 담배가 필요했다. 나에게도 고통이 필요했다. 난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디 한번 다시 울어보시지! 너만 아픈 줄 알아! 나도 아프다!

 

주의 집으로 돌아 왔을 때 주는 깨어 있었다. 주는 불조차 켜지 않은 방에서 침대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불도 안 켜고 뭐해?

우둑한 어둠 속에서 내 담배는 더욱 커졌다. 담배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내 몸뚱이 모두 담배가 된 듯한 느낌이다. 창가에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에 희미하게 그녀가 보인다.

담배…… 냄새나.

아아…… 담배 폈으니까.

불 켜지마!

스위치를 찾아 벽을 더듬는 내게 그녀가 소리쳤다.

불 켜지마. 불 켜지마.

왜?

날 보는게 무서워. 널 보는 것도…….

난 묵묵히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날 어떻게 봐야하지, 널 어떻게 봐야하지. 불을 켜면……. 아이가 보일 것만 같아. 아이는…… 너를 닮았을까? 아님 나를 닮았을까?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상관이야.

스위치를 올렸다. 형광등이 깜빡깜빡 거리며 방안을 비췄다 말았다 한다. 잠깐 잠깐 환해지는 불빛에 그녀는 더 깊게 고개를 숙여버린다. 이내 불빛은 방안을 환하게 비추었다. 환한 형광등 불빛이 꽃무늬가 어지러운 하얀 벽지를 더욱 희게 만들었다. 흰 벽지 위엔 습기에 어린 곰팡이가 검죽검죽 묻어 있다. 하얀 방 안의 곰팡이는 우리 둘 만큼이나 도드라져 보인다. 하얀 세상 위에 검은 몸의 우리와 곰팡이만 있는 것 같다. 담배 연기가 곰팡이를 제거한다고 하던데…….

여기…… 아기가 있었어…….

주가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그래.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난 그녀의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담배를 입에 물었다.

우리…… 아기였어……. 우리가 죽인거야…….

난 대답하는 대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 냄새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담배…… 피우는 구나…….

난 담배연기를 내뿜어 보였다. 그녀는 날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예전에 내 친구가 그렇게 말했어. 남자들은…… 담배를 피운다고. 싫다고 해도, 담배를 피운다고. 그래서 나중엔 자기도 피우지 말라고 말하는 걸 포기한다고…… 담배 냄새가 싫어도 그 남자가 좋아서 말리지 않는다고…… 너도 이제 담배…… 피우는구나.

넌, 담배 좋아해?

주는 고개를 저었다.

담배는. 더러워 보여. 너도.

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담배 연기에 새하얀 벽지가 조금씩 부옇게 색이 뜨는 느낌이다. 순백의 벽지 위에 핀 곰팡이가 더 이상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다. 난 담배를 침대 곁의 접시 위에 꺼버리고 일어섰다.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그녀는 흔들리지도 않고 초점도 없는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담배 연기 사이에 그녀의 얼굴이 흐려 보인다.

우리, 용서받을 수 있을까? 아기한테서?

헤어지자.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하지만 이내 눈동자는 떨림을 멈춘다. 난 아이를 지울 때처럼 장황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래. 안녕.

신발을 신고 문을 닫아버리고 그녀의 집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와 그녀의 집 아래에서 담배에 다시 불을 붙였다. 안녕이란 발조차 하지 않았다. 담배 한 개비로 다 잊어야지.

 

마지막으로 담배 연기를 뿜어내고 꽁초를 강가로 던져버렸다. 모든 것이 기억났다. 담배 연기 뒤에 가려져 뿌옇게 보이던 기억들이 연기를 걷어내고 앞으로 한 걸음 내딛는다. 기억이, 담배가 나에게 모든 것을 상기시킨다.

담배는 나빠요!

언젠가 회사 휴게실에서 본 금연 포스터가 나에게 소리친다. 해맑게 웃는 아이가 철창 안에 갇힌 담배가 우는 그림을 들고 있는 포스터였다.

내가 죽였다. 나는 내 딸을 죽여 버리고 그것도 모자라 기억 속에서 주를 죽여 버리고 담배 연기 속으로 도망쳤다. 그것은 죄였다. 나쁜 것은 담배가 아니라 나였다. 난 담배 한 개비면 모든 것을 잊을 줄로만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담배는 나의 죄를, 그녀들의 죽음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다. 담배 연기가 걷어지면 드러나는 것은 두 여자의 죽음이었다. 담배 연기로 덮으려 했지만 내 죄의 냄새는 덮어질 것이 아니었다. 담배 연기가 내 죄를 감싸 안는 것은 순간이었다. 담배 연기는 순간 내 죄를 보이지 않게 만들었지만 연기는 곧 걷혀 버린다. 돌아오는 것은 지독한 죄로 물들어 있는 대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었고 난 다시 담배를 피우면서 그 거울이 보이지 않게 했다. 영혼마저 담배로 물들게 했다. 아이야, 나쁜 것은 담배가 아니라 이 아저씨란다.

행복한 순간이 계속되면서 그날의 행복과 죄가 떠오른다. 아침부터 간절해지던 담배가 이제야 이해된다. 난 연과 결혼할 수 있을까? 이런 죄로 가득 찬 내가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까? 기독교에선 인간을 날 때부터 전적으로 타락하고 되로 가득 찬 존재라고 이야기하던가? 전적으로 동의한다. 적어도 난 날 때부터 타락했고 죄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내 딸이 보기 무서웠던 걸까? 딸마저 죄로 차 있을까봐? 아니면 주를 닮아 죄 하나 없는 딸이 태어나 내 모습을 비출까 겁이 나서?

담배라면 내 죄를 덮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담배는 일시적이었다. 순간순간 내 죄를 덮을 순 있었어도 한 개비가 영원히 내 죄를 덮을 순 없었다. 그래서 난 담배를 잊지 못한다.

여기서 뭐해?

갑작스런 연의 목소리에 뒤돌아본다. 연이 제방의 계단을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난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냥…… 생각.

안 피곤해?

괜찮아.

그녀가 천천히 다가온다. 나도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천천히 입술을 가져간다. 그녀가 살며시 눈을 감는다. 내 입술이 그녀의 입술과 포개진다. 촉촉한 그녀의 입술이 바싹 마른 내 입술에 수분을 나눠준다. 담배 냄새가 그녀의 립글로스 향기를 삼켜버린다.

담배 냄새나.

살짝 입술을 떼자 그녀가 말했다.

좀 끊으라니까!

마지막 한 개비였어. 이젠 담배 끊을 거야. 그러니까 너무 그러지마.

피…… 거짓말.

난 다시 입을 맞추었다. 조금 더 격렬하게, 그녀의 입 속으로 내 혀를 밀어 넣었다. 담배 냄새 가득한 내 혀가 그녀의 혀를 감싸 안는다. 그녀가 나지막하게 콧소리를 낸다. 입술을 떼자 그녀가 내 눈을 바라보며 말한다.

담배 꼭 끊어.

난 그녀의 말에 눈웃음만 보였다.

담배를 끊을 수 있냐고? 태어날 때 가지고 있던 담배는 아직 반 갑이나 남아있다.



----------------------------------------------

2007년 국어교육과 학술제 기념 문예창작부 동인지 『늘픔』제 1호에 수록된 내 단편소설 <담배>.


함께 수록된 보람이의 소설 <화양연화>와 함께 에로티시즘 소설의 양대산맥으로 평가받은 비운의 작품.


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쓴 소설.

(이 소설 이후로 내가 재능이 없단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땐 정말 잘 썼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박쌤이 "의미없는 난해함과 허황된 낭만주의로 가득찬 작품"이라 평할 만 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