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소설 연구
Ⅰ. 들어가며
한민족 역사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사건을 고르라는 질문에 많은 이들이 주저없이 일제 식민지 시대를 꼽는다. 단순히 나라를 다른 이에게 빼앗겼다는 민족적 수치감이 작용한 대답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나라를 빼앗겼다는 사실보다 더욱 수치스러운 사실은 많은 한민족-조선인들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찬동했다는 사실이다. 민족적 정체성을 상실한 채 일제의 식민통치에 찬동한 대가는 컸다. 그 대가는 당대의 치욕을 넘어서 그 시대를 살지 않은, 일제 식민통치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까지 수치감을 일으키고 우리 대한민국의 생활 양상 곳곳에서 일제 식민통치의 잔재를 옅볼 수 있다.
이것은 문학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개화기 당시의 한국 문학은 그 상상력의 한 발원지를 선행하는 일본 문학에 두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점은 예컨대 개화기의 신소설이 일본 정치소설의 영향을 빼놓고서는 논의도리 수 없는 것을 미루어서도 알 수 있다. 일제하의 한국문학은 이루 그 상상력의 테두리가 일본을 벗어날 수 없었으며 형상화된 상상력 또한 일제의 검열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이는 개화기 이래의 한국문학이 무의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 항상 친일적인 혐의를 받을 수밖에 없는 까닭도 된다. 이는 또한 일제하의 한국문학은 전폐되어야 마땅하다는 극단적인 주장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그러하기에 암흑기 친일문학의 실상을 밝혀 드러내 놓지 않고는 한국문학사도 존재할 수 없다.
이에 이 레포트에서 우리는 친일 문학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구체적인 사례들에 대해 알아 볼 것이다.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가 우리 문학, 그 중에서도 우리 소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할지 그 시각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이다.
Ⅱ. 친일 문학의 규정
1) 친일 문학의 조건
친일 문학이란 어떤 문학을 지칭하는 것인가? 모든 이야기에 앞서 구체적으로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지 친일 문학이 될 수 있는 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일제 시대 36년의 기간 동안 쓰여진 그 많은 문학 작품들이 모두 친일 문학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단지 일제시대에 쓰여졌다는 이유만으로 그것들을 친일 문학이라고 한다면 저항 시인들로 잘 알려진 이육사나 윤동주, 한용운 등의 시 역시 친일 작품이 되는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친일 문학이란 대체적으로 일제 말엽부터 황국신민화 정책과 전시 정책의 일환으로 강행된 문학으로 다르게는 국민문학으로도 호칭된다. 국민이라는 것이 일본 천황의 신민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황민 문학으로도 불리고 있다. 그럼 이제부터 친일 문학의 구체적인 조건을 살펴보겠다.
친일 문학의 구체적 조건으로는 우선 일본 정신을 밑바탕으로 두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일본 정신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일본 정신이란 만세일계인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제정일치의 국가 정체와 만백성을 천황의 적자로 생각하는 가족국가적 조직 형태를 유지한다는 것과 천황의 도를 세계에 고루 펴게 함으로써 사명을 다한다는 것 등을 일컫는다. 간단히 말하면 문학작품이 천황 중심의 전제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 일본 정신에 입각해서 문학 작품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일본 정신이 평소에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생활화된 상태에서 천황의 신민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긍지를 느끼며 감사하는 정신이 문학작품에 내포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셋째, 일본 정신을 내적표현이라고 한다면 그것과 함께 일본의 외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 신민으로서의 생활을 소재로 삼아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30년대 말 이후에는 황국신민화와 전쟁 완수라는 그 시대적 요청에 의해서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 많았다.
넷째, 일본 정신을 선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일본 국민으로서 긍지를 가진 인물을 표현함으로써 타인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게 하고 대중이 그 인물을 우러러 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조건으로는 외적 형식을 들 수 있다. 일본 정신을 표현하고 선양하기 위해서는 문학 작품이 조선어가 아닌 일본어로 쓰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2) 국민문학
국민문학의 개념은 절대한 의미에서의 그것과 상대적 의미에서의 국민문학이라는 두 방면에서 추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중 절대적 의미에서의 국민문학을 말할 때 이는 국민정신에 입각한, 국민생활을 선양하는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국민문학이란 세계에 오직 하나가 있을 뿐이다.
상대적 의미에서 국민문학의 개념을 추구할 때 세계는 세계에 있는 국가의 수효만큼의 국민문학을 가지게 된다. 즉, 미국의 국민생활을 선양하는 문학은 미국의 국민문학이요 영국의 국민정신에 입각한 문학은 영국의 국민문학이며, 일본정신을 표현한 것은 일본의 국민문학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의 국민문학은 서로 독립한, 불가침의 관계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즉 상대적인 입장에서 일본의 국민문학의 개념을 추구할 때 그것은 또 광협(廣狹) 이(二)의로 논할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의 일본의 국민문학은 즉 고유한 의미에서의 그것인 바, 이는 시대와 유파에 관계없이, 일본정신에 입각한, 일본국민생활을 선양하는 모든 문학을 말하게 된다.
좁은 의미의 일본의 국민문학은 시대적 요구에 의하여 시대적 명제로서 제기된 문학운동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것은 만주사변(滿洲事變) 지나사변(支那事變) 등으로 싹트기 시작하여 대동아전쟁 당시에 가장 열의있게 부르짖어지던 문학운동으로서의 그것에 한정될 뿐이다. 조선에서는 이 문학운동이 이미 말한 것처럼 지나사변을 전후하여 움트기 시작하였고, <조선문인협회>의 결성으로 그 주류적인 성격을 획득했으며, 해방과 함께 소멸하고 말아 버렸다.
우리가 사용하는 ‘친일파’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어느 역사시대에서나 볼 수 있는 외세파와 친연성을 가지는 정치집단이라는 의미라기보다는 민족적 정서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반역사적 행위를 한 매국노, 민족반역자와 같은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친일문학을 규정하는 기준은 역시 시기, 내용, 작가에 따라 다양하게 정의할 수 있다. 하지만 일제하 전 기간의 친일문학이 아니라 ‘일제 말엽 황민화, 전시 정책의 일환으로 강행된 문학운동을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이다. 이같은 범주의 문학은 중일전쟁 이후 시국시인을 당면과제로 하는 전쟁문학의 형태로 그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 단계가 지나자 그것은 조선 총독 미나미(南次郞) 5대 정강의 기본인 국체명징을 인식의 내용으로 하는 소위 ‘애국문학’을 출현시켰다. ‘국민문학’은 이같은 흐름을 더욱 고차원적으로 발전시킨 최종 형태이며, 전쟁문학․애국문학 기타 일체의 일본적인 것을 종합적으로 포괄한다. ‘국민문학’은 일본 정신에 입각하여 황민으로서의 자각을 가지고 국책에 적극 호응하여 일본어와 일본어적인 사상과 생활을 지향하는 문학으로 정의할 수 있다. 『문장』과 『인문평론』을 통합한 어용잡지『국민문학』의 창간 목적은 ‘조선문단의 혁신’이었는데 이것은 곧 조선 문학의 일어화와 국민문학으로의 재편성을 의미한다. 문인들은 조선문학의 기본인 조선어를 버린 채, 일어로 일본의 정신과 생활을 그리는 것을 강요받았다. ‘조선문인협회’가 ‘조선문인보국회’로 개편되면서, 문인으로 행세하는 길은 무조건 ‘천황귀일’과 ‘일본적인 것의 생활화’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문인들은 창조의 주체가 된 것이 아니라 천황제 파시즘의 수족으로 전락해 갔다.
Ⅲ. 친일 작가와 친일 작품들
1) 이인직
이인직이라는 이름은 아직도 우리 근대문학사의 서장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신소설의 개척자로서 우리는 아직도 『血の淚』(1906)를 최초의 신소설로 신주단지처럼 모신다. 그런데 조금만 주의하면 이 작품은 제목부터 일본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식 어법이라면 이 제목은 그냥 '혈루'이거나 '피눈물'이 되어야 하는데 일본어소유격 조사 '노(の)'가 나타나 있다.
또한 문체에선 한자어에 토를 달았다. 이것은 일본식의 문체-루비(るうび)-이다. 이 번거로운 일본식 문체는 이미 봉건시대부터 한글전용의 전통을 견지하고 있던 우리 소설 문체에 대한 일대 후퇴인 것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 작품의 시각이다. 청일전쟁(1894)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작가는 청군의 부패를 맹렬히 규탄하면서도 일본군의 만행에는 짐짓 눈감고 고난에 빠진 여주인공 옥련을 일본 군의관으로 하여금 보호하게 함으로써 일본이야말로 조선의 구원자라는 의식을 교묘하게 심어 주고 있는 것이다. 옥련은 일본에서 다시 조선 청년 구완서에 의해 위기에서 벗어난다. 그런데 이 청년 또한 수상하다. 비스마르크를 흠모하며, 우리나라를 야만으로 은근히 멸시하는 이 민족허무주의자는 일본과 만주를 합하여 대연방을 건설하겠다고 꿈꾸니, 그 꿈은 만주침략(1931)에서 실현되었던 것이다.
2) 이광수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1919년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무정」을 연재하고 1919년 도쿄에서 2․8 독립 선언서를 기초한 후 상하이로 망명, 임시정부기관지 독립신문의 주필을 맡아보는 등 민족을 위한 독립 운동가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1921년 일제에 투항, 귀국하여 허영숙과 재혼하고 이듬해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조선인은 “허위되고 공상과 공로만 즐겨 나태하고 신의와 충성이 없다” 운운하면서 민족의 성격을 개조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후 동아일보 편집국장, 조선일보 부사장을 거쳤으면, 1939년 친일어용단체인〈조선문인협회〉회장에 취임하고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일제의 국민총동원 계획에 참여하여 1943년 12월 일본유학생의 학병지원 권고 강연에 나섰다.
이관수는 조선문인협회 회장과 내선일체의 실천을 위하여 일본정신을 깨닫고 황도를 따르자는 황도학회 발기인 대표를 비롯,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 대동아문학자대회, 조선문인보국회, 대화동맹, 조선언론보국회, 대의당 등 온갖 친일단체에 참여하여 황국신민화, 징용․징병․학병․정신대 권고문 따위의 많은 글을 써 민족을 배반하는 행동을 하였다.
해방 후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어 자신의 친일행각을 변호하는 「나의 고백」이란 글에서 “애국을 위해서 친일했다”라는 궤변․망언을 늘어놓다가 6․25 때 납북되었다.대표적인 친일 소설로는 「사랑인가」가 있다.
※이광수의 친일 소설
1) 내선일체의 소설화
a. 전향과 신혼여행 - <진정한 마음이 만나서야말로>
b. 중단된 이야기 - <그들의 사랑>
2) 총후봉공의 소설화
a. 봄의 노래와 겨울의 침묵 - <봄의 노래>
b. 조선인의 마음 고쳐먹기 - <가가와 교장>
3) 성전 의식의 소설화
a. 꼭두각시들의 이야기 - <대동아>
b. 배신자 원술랑 - <원술의 출정>
4) 아버지 되기의 문제
a. 아들 죽이기 - <군인이 될 수 있다>
b. 딸 죽이기 - <소녀의 고백>
3) 김동인
김동인(1900-1951)은 평안남도 평양의 부유한 교회 장로의 아들로 태어났다. 숭실중학을 중퇴한 후 일본 도쿄 명치학원 중학부를 거쳐 도쿄 천서미술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중퇴하고 문학으로 방향전환 하였다. 1919년 2월 순문예지 『창조』를 창간, 여기에 단편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는 등 문학인으로 활동하다가 중일전쟁 이후 친일 문인으로 변절하였다
1939년 4월 12일 황군작가위문단이 결성되어 박영희․임학수와 함께 부민관에서 성대한 장행회가 열린 후 중국전선을 돌면서 일군장병을 위문․격려하였다. 북경․석가장․태원 등을 거쳐 약 1개월 여의 ‘종군작가’ 활동을 벌인 것이다. 이때 임학수는 『전선시집』을, 박영희는 『전선기행』을 각각 책으로 펴냈지만 김동인은 여행 도중 두 차례나 졸도하고 의식불명 상태를 빚어 글을 쓰지 못하였다.
그러나 건강이 회복되면서 1939년 1월 문필보국과 내선일체를 표방하는 조선문인협회 간사직을 맡았다. 이에 앞서 1938년 봄 한 마디 넋두리 때문에 ‘천황모독죄’로 일본 헌병대에 끌려갔다가 나와서는 자진해서 총독부 학무국을 찾아가 친일하겠다고 자청하여 화제가 되었다. 조선문인협회의 간사도 자청하여 얻게 된 것이다.
김동인의 대표적인 친일 작품으로는 1941년 「백마강」,「성암의 길」,「세이강의 길」등이 있다. 이 중에서 「백마강」은 작품 곳곳에서 내선일체를 강조하고 일본의 풍습을 찬양하는 구절을 읽을 수 있다. 다음은 복신이 의자왕에게 일본 사신의 내방을 알리면서 하는 말로「백마강」의 일부분이다.
네… 그 사이 양국의 사이가 약간 소원하게 되었던 게 실수옵지 왜 소원하리까? 첫째로 혈통으로 보아서 우리 부여씨(백제 왕실)의 혈통에 저 나라 피가 얼마나 많이 섞이었습니까? 또 우리 부여씨의 피가 저 나라 왕실에는 얼마나 많이 섞이었습니까?
위로서 이같은 피가 얽힌만치, 아래 백성으로도 우리나라 백성이 얼마나 많이 저 나라에 건너가서 잡거해 살며, 저 나라 백성은 또 얼만 우리나라에 건너와 잡거해 삽니까? 잡거해 살면서 혼인하고 자손이 생기고 이렇듯 서로 피가 교류되기 몇 백년에 먼저 생긴 자손들은 각각 사는 나라의 백성으로 화하고 지금 와서 내 백성을 서로 가릴 수가 도저히 없게 되지 않았습니까? 위와 아래가 한결같이 어느 족속인지 구별 못할 종족들이 다만 나라를 각각 달리하기 때문에 내 나라 네 나라 구별하는 뿐 본시로 말하자면 형아 아우야 하고 지낼 사이올시다.
4) 박영희
카프의 대가이면서 나중에는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카프와 결별한 그였으면서도 38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을 발기하여 친일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1938년6월20일부터 도쿄에서 개최된 전향자위원회에 조선전향자 대표로 피선되어 참석했으며, 이것이 그의 전향이 행동으로 나타난 최초의 경우였다. 이후 그는 황군위문작가단으로 만주를 다녀오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20년대 반도에서 프로문학 건설을 부르짓던 붓을 씻고 황도주의 <국민문학의 건설(매신.40.1.1.)>을 제창하였다.
그는 <국민문학의 건설>에서 국민문학운동이 (현재 문학운동에 주류를 형성할 수 있는 어떠한 통일된 정신)을 수립함에 있다고 보았으며, 그 <통일된 정신>을 <일본정신은 애국적인 각도, 혹은 전사의 충용에 뿐만이 아니라 광범위한 국민문화 전체에도 표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는 그러한 논리로 국민문학론을 전개해 나갔다. 이러한 논리에 입각해서 그는 몇 가지 실천적 행동을 제시하였다. 그 하나는 <현실속으로 뛰어들어가서, 그 현실의 생생한 생활면을 잡아가지고, 문학의 시대성을 충분히 발휘할 것>이요, 또 하나는 <전쟁이 가져오는 한 개의 이념을 잡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는 문학의 활동범위를 한 군데로 집중시켜야 하며, 둘째는 문학은 이 국민적 의무로써 화려한 꿈을 현실의 형로(형로)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문학인들은 이러한 실천적 과제를 충실히 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논리들을 많은 글로 발표하였다.
5) 최남선
최남선은 이광수와 같이 1910년대 - 소위 2인 문단시대라고 일컫는 시기에 우리나라의 문학을 근대문학으로 이끌었고, 3.1운동 독립선언문의 초안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는 1940년대에 들어와서는 변질을 하여 우리 조선민중의 가슴에 크나큰 피멍이 들게 하였다.
최남선이 쓴 글로 <조선문화 당면의 문제(매신.37.2.9~11)>이라는 글이 있다.
이 글에서 그는 그것을 근대화,일본화,그리고 그들과 전통어 생활과의 마찰관계 처리문제 등 셋으로 크게 구분한 후에, <제1의 근대화문제는 인류생활의 보편적 귀추라는 점에서>, 또 <시대에 순응하는 자기발달의 당연과정으로의 인식>함으로써 대가없이 진행해 나갈 것이니 결국 문제의 촛점은 <일체양변의 것>이 아닐 수 없다고 전제하였다.
이리하여 조선민중이 일본화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을 승정한 그는 문화국인, 그러나 보편적 의미에서 일본 독자의 것이라고 할 문화가 그다지 인정되지 않는 일본문화에 관하여,국민생활을 바르게 인도하고 강하게 유지케 하는 세력/사물을 그 민족문화라고 보는 입장에서 <빛나는 독자문화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이 원리에 의해서 조선은 일본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문화원리>야 말로 정책이나 통치라는 개념보다 우월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후의 최남선의 친일적 문학활동은 <매일신보 시국대중판(37.8.15.)>에 발표된 내일의 신광명 약속>이 있다. 그는 여기서 동양적 내셔널리즘에 입각하여 만주사변의 역사적 유래를 설명하면서 뿌리깊은 백화와 무서운 적화에 대처할 비상시국하의 국민의 각오를 논했고,
다시 수필 <성전의 설문을 발표하여 성전의 의의를 자학상으로 규명한 그는 <아시아의 해방(매신.44.1.1)>에서 대동아전쟁은 <진실로 일본급 일본정신을 발단자,중추세력 또한 지도원리로 하는 전 동아의 해방운동>이고 <세계개조의 중대한 계자인 동시에 인류역사의 세계를 현전케 하는 기연>이라고 정 의 하면서 학도병 출정을 권장하는 글들을 발표하였다. 학도병 관계의 글로 <보람있게 죽자(매신.43.11.20)>등이 있다.
6) 이효석
이효석(1907-1942)은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났다. 경성제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1928년 『조선지광』에 단편 「도시의 유령」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경향문학의 동반작가로 인정받았다. 초기에는 동반자적인 색채가 있는 「도시의 유령」「노령근해」등을 발표했지만, 1933년경부터 「메밀꽃 필 무렵」「개살구」「낙엽기」등의 작품으로 자연과 인간본능의 순수성을 시적 경지로 끌어올렸다.
이와 같은 순수문학을 추구하던 이효석은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친일성향의 작품을 쓰거나 친일단체에 가담하여 문학적 순수성을 상실했다. 즉 1940년 1월 조선문인협회 주최의 평양대강연회에 김동화․유진오․정인성 등과 연사로 나서고, 같은 해 11월 역시 조선문인협회가 이른바 신체제의 국민총력운동에 발맞추어 직접 일반 민중에게 외치기 위하여 문인 강연부대를 조직, 전선과 주요 도시에 문예보국 강연회를 열 때 연사로 참여한 바 있다.
친일 작품에는 『국민문학』 1941년 11월 창간호에 일문으로 쓴 「아자미의 장」이 있다. ‘아자미’는 늦봄에 적자색 민들레 비슷한 꽅이 피는 엉겅퀴속 식물이다. 작품에서는 주인공인 일인 여급 ‘아자미’의 이름과 동일한 발음으로 읽히며, 따라서 그 여주인공을 상징하는 제목이다. 이 작품은 일제가 민족말살의 수단으로 권유했던 이른바 일선통혼을 소재로 하고 있다. 제령 제19호 ‘조선민사령개정-창씨개명제’와 함께 발표된 것이 서양자․타성 양자를 제도화한 ‘양자법 개정’인데, 동화와 민족 말상을 노린 제도이다. 약혼자 여희를 팽개쳐둔 채 일인 여급 아자미와의 치정에서 세어나지 못하는 주인공을 통해서 우리는 그 시대 일부 지식인들의 정신자세를 읽을 수 있다. 다음은 「아자미의 장」 서두 부분이다.
백화점 아래층 같은 데서 꽃무더기를 보면 현은 문득 당황해질 때가 있다. 빨간 서양 엉겅퀴의그 노여움을 품은 듯한 강렬한 생김에 아내 얼굴이 겹쳐오기 때문이다. 장식단추마냥 자그마하게 타고 가만히 가라앉아 있으면서도 어느 구석이나 화려하고도 분방한 꽃잎은 거기에 그냥 그대로 아자미의 인상을 담고 있는 듯이 여겨졌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서, 다다미에 누워 뒹굴고 있는 그녀 모습을 보았을 때 문득 안도감 비슷한 것을 느낀다.
“있었구먼, 혹시 나가지나 않았나 해서 바삐 왔는데.”
“당신은 노상 걱정이군요. 호주머니 속이 이렇게 비어서야 거리엔들 나갈 수 없지요.”
“지친 얼굴로 때를 노리고 있는 듯한 그런 눈길이군, 항상. 그래도 좋다고. 그럴 때는 드럴 때대로. ……꽃을 사 왔어. 당신이 좋아하는 엉겅퀴.”
“당신답지 않게. 귀엽고, 깨끗하군요.”
아자미는 일어나 다발째로 꽃병에다 꽂곤, 맨다다미 위에 덮어둔 책있는 데로 돌아왔다.
“하루종일 독서삼매예요. 지난 한 달 동안 꽤나 읽었어요. 상자 속의 책을 거의 다 읽어치웠으니.”
“지금 열심히 공부해 두어야 할걸. 조만간에 내가 실직하게 될는지도 모르니까. ……신문이 아무래도 틀린 것 같아.”
“기어이 폐간이 되는가요?”
대강 나름대로 사정을 눈치채고 있던 터여서 그녀도 뜻밖에 예사로운 목소리다.
“우리 사뿐 아니라, 이참에 두셋이 한꺼번에 그리 될 모양인데, 시국에 따르자니 별수없지 뭐. 필경 이 한 달 안일걸. 그런들 어때. 또 한 번 실직자로 되돌아가지 뭐.”
“당분간 휴양하는 셈치는 게 당신에겐 마침 잘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그냥도 힘들어어하던데, 더구나 편집일은 꽤나 격무 아니에요.”
“오기를 부린들 별수없고, 당신한테 정말 미안해.”
“어떻게 되겠지요. 인간의 일이니.”
7) 최정희
최정희(1912-1990)는 함경북도 단천에서 태어났다. 숙명여고보를 거쳐 중앙보육학교를 졸업했다. 1932년 『시대공론』에 「명일의 식대」를 발표하고, 1933년 『형상』에 「성좌」를 발표했다.
본격적으로 친일문학활동을 시작한 것은 1935년 『조광』에 「흉가」를 발표하면서부터이다. 이로부터 많은 친일작품을 썼는데, 1939년5월 14일자 국민신보에 「어머니의 마음」, 『대동아』1942년 5월에 「작가도목건작」등 일어 수필을 비롯, 매일신보 1942년 2월 21일자에 「동아의 새 아침」, 1941년 7월 15일자에 「시국과 소하법」, 『대동아』1942년 7월호에 단편소설 「장미의 집」, 같은 해 『국민문학』11월호에 「야국초」, 『신시대』1942년 4월호에 「2월 15일의 밤」등이 있다. 「야국초」는 버림받은 여인이 그 전 남자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단편으로, 어린아들과 훈련소를 견학하면서 지원병 훈련생들의 ‘애국심’을 아들에게 전하는, 침략전쟁을 미화시키는 내용이다. 「2월 15일의 밤」은 일제가 싱가포르를 공략한 날인 2월 15일을 상기하면서 아내의 애국반 활동을 반대하던 남편이 그날 싱가포르 공략의 첩보에 감격해서 아내의 시국활동을 승낙하는 시국소설이다.
친일단체에도 참여한 최정희는 1941년 12월 부민관 대강당에서 조선임전보국단 결전부인대회를 결성하고 「군국의 어머니」라는 강연을 했다. 이 강연에서 “우리 1천5백만 여성이 한 맘 한 뜻으로 총후봉공한다 하면 우리의 천추만대에 내려가면 대대손손이 황국신민으로서의 무한한 행복을 누릴 것이다”라고 외쳤다. 이 밖에도 1940년 1월 조선문인협회 주최 평양대강연회에서 「자화상」이란 글을 낭독하는 등 작품과 활동면에서 뒤지지 않는 친일행동을 하였다. 해방 후 서울시문화상, 여류문화상, 예술원문학부문 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다음은 소설 「야국초」의 중간부분이다.
아이는 제 손을 꽉 쥐고 다리를 건넜습니다. 아이에게 손을 잡히고 나서, 저는 당신 일을 생각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다리를 건너서 얼마 가지 않았는데, 논길 저쪽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승일디도 저도 서로 짠 듯이 그쪽으로 향하였습니다. 승일이만한 아이가 풀을 베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노래는 승일이도 언제나 부르고 있는, ‘어른이 되면 우리들도’입니다.
전국에서 터져 오는 / 환호성에 맞춰 뛰노는 가슴
어른이 되면 우리들도 / 나라를 지키는 군인 아저씨가 되어
멋진 공을 세울테야
승일이도 무르기 시작합니다. 저도 모르는 새에 따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풀 베는 아이는 허리를 펴고 이쪽을 보고 있습니다. 승일이는 그 아이에게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습니다. 둘은 박자를 맞춰 부르고 있습니다. 노랫소리는 잠자리가 나는, 아름답게 푸른 하늘로 울려퍼집니다.
귀중한 군기(軍旗)를 받고 / 계승한 역사와 이 긍지
어른이 되면 우리들도 / 아세아를 일으키는 군인 아저씨가 되어
세계에 자랑거리가 될테야
상당한 거리인데도 불구하고 노래의 박사가 잘 맞습니다. 언젠가 두 사람 다 같이 나라의 무름을 받고 진력할 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논길인데다가 이삼 일 전에 비가 내려서 노면(路面)은 나빴지만, 승일이는 아주 야무진 발걸음입니다. 논길 저쪽에 있는 아이는 아직도 노래 부르고 있습니다. 승일이도 뒤돌아보며 부르고 있습니다.
8) 최재서
최재서(1908-1964)는 황해도 해주 출생. 경성제대 영문과를 거쳐 영국 런던대학에서 유학하였다. 귀국 후 경성제대 강사, 보성전문학교․법학전문학교 교수 등을 지내면서 영문학을 가르치고 문학평론을 썼다.
친일파로 나서게 된 것은 1939년10월『인문평론』을 창간하여 주간으로 있으면서 잡지 권두언에 친일적인 내용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창간호 권두언부터 친일 색채가 강한 글을 쓴 최재서는 『인문평론』1940년 6월호에서는 본격적인 ‘전쟁문학’에 관해 언급하면서 호전성을 부추기고, 조선사람의 전쟁참여를 주창하였다.
최재서가 ‘문학인’의 본령을 저버리고 본격적으로 친일 문인으로 변신한 것은 1941년 11월 친일 문학잡지 『국민문학』을 창간하면서부터이다. 1940년 8월 조선총독부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폐간시킨 데 이어 용지공급 문제 등을 이유로 모든 문학잡지를 폐간시켰다. 그로나 총독부는 유일하게 최재서에게 이른바 ‘국민문학’을 주도할 수 있는 잡지를 내도록 하여『국민문학』이 창간되었다.
이 잡지는 노골적으로 친일을 내세워서 ‘국체관념의 명징, 국민 의식의 아양, 국민사기의 친흥, 국책에의 협력, 지도적 문화이론의 수립, 내선문화의 종합, 국민문화의 건설’ 등을 내걸고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최재서는 『국민문학』의 주간으로 있으면서 창간호에 쓴「국민문학의 요건」을 비롯하여 많은 친일 논설 등을 쓰고, 다수의 친일 문인들을 동원하여 황민화운동과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글을 쓰게 하였다. 그리고 잡지에 싣는 모든 글은 반드시 일어만 사용토록 했다.
친일문학의 활동뿐만 아니라 1943년 8월 제2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한 것을 비롯하여 친일단체인 조선문인보국회의 이사로서 ‘조선문학운동의 보고’ 강연회의 연사로 나서기도 했다. 해방 후 연세대․한양대 등에서 교수를 지내면서 문학평론 활동을 계속하였다.
다음은 그의 친일 작품인 「보도연습반」이다. 「보도연습반」은 중국의 전쟁을 취재할 언론계 종사원들을 미리 연습시키기 위하여 그 쪽과 지형이 비슷한 평양 부근의 훈련소에서 미리 연습하는 주인공 송영수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쓴 다분히 자전적인 소설이다.
이 작품의 절정은 마지막 부분으로 이 훈련소에 나온 조선인 지원병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야기 대목이다. 즉, 지원병 중 한 사람이 자신이 고향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면서 동네 친구 중 한 사람이 징병을 끌려가기 보다는 지원병이 되는 편이 낫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듣고 그것을 한심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부분이다. 이 병사는 “뱃속까지 완전히 황국신민이 되지 않은 자는 군대에 들어가서도 비참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다. 다음은 작품의 끝부분이다.
소학교 삼년 밖에 다니지 못했다는 기요모또 상등병은 거리낌없이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내지인의 사회가 훌륭한 것은 군대 훈련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지식이 있고 아무리 돈이 있어도 군대 훈련을 받지 않으면 제 몫을 다 하는 인간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민간인은 아무리 해도 군대에서처럼은 할 수 없으니까요.”
이 이야기는 모두를 고소케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선서식 날 보도부장으로부터 들었던 “병영은 인생대학이다”라는 말의 실증이었던 것이다.
군데에 들어와서 고통스러웠던 일은 없었으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단지 미소만 지을 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과연 그들은 그 고통을 미소로써 생각해낼 정도로 성장했다. 그 대신 감격스러운 일을 하나둘 가지고 있지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 감격이란 건 요컨대 내무반원이 친절했다는 것이나 윗사람이 내선 구별없이 대해 주었으므로 내지 출신 전우들과 진실로 피를 나눈 형제처럼 사이좋게 지냈다는 사실로부터 오는 것 같았다.
“나는 장래에 내지 동포와 일심동체가 되어 제 일선에서 일하고 싶다.” 고 말하는 가네모또 상등병의 이야기는 곧 10명의 소리이고, 또 그 소리는 내무반 생활에서 울려나오는 자연스러운 소리임이 틀림없었다. 모든 문제와 의논이 여기서는 단지 실천에 의해서 신속하게 처리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충군애국이라는 말이 하나하나의 행동으로 나타나고 확실하게 소화되어 가는 것 같았다.
9) 이무영
본명 용구(龍九). 충북 음성(陰城)에서 출생하였다. 1925년 도일, 세이죠[成城]중학교에 다니다가 일본작가 가토 다케오[加藤武雄] 문하에서 수업 받았다. 1932년 장편 《지축을 돌리는 사람들》을 동아일보(東亞日報)에 연재, 이어 《B녀의 소묘》 《창백한 얼굴》 《오후 영시(零時)》 등의 단편과 희곡 《탈출》을 발표함으로써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보했다. 1933년 이효석(李孝石) 등과9인회 동인이 되었고 1934년 동아일보사 학예부 기자가 되었으며 1936년부터 문예지 《조선문학》을 주재했다. 이 때부터 본격적인 농촌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제1장 제l과(第一章第一課)》 《흙의 노예》 등을 발표했다.
일제강점기 말(1942~1945)에는 《대동아전기(大東亞戰記)》 《개천촌 보고》 등 친일적인 글들을 남겼다. 『부산일보』에 발표하였던 장편 「청와의 집」을 신태양사에서 간행하여 1944년 제4회 ‘선선예술상’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그 수상 이유의 하나가 ‘처음 일본어로 씌어진 장편소설’이라는 점이었다. 1951년 해군정훈감(海軍政訓監)이 되고 문총(文總) 최고위원을 역임했으며, 1956년 《농부전초(農夫傳抄)》로 제4회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작품에 《명일의 포도》 《세기의 딸》 《먼동이 틀 때》 《농민》 등이 있고, 단편집 《취향(醉香)》 《산가(山家)》 등이 있다.
「어머니」는 1944년 4월 25일 동도서적에서 간행된 이무영의 단편모음집 『정열의 서』에 수록된 8편 가운데 하나로 주인공 ‘어머니’가 일제 말기의 식량 증산 시책에 부응하여 천신만고 끝에 마련한 과수원을 보리밭으로 바꾸는 이야기가 이 작품의 결말 부분을 이룬다. 다음은 「어머니」의 앞부분이다.
“그렇다구유. 선상님한테는 딱 맞는다구 생각해유. 아니, 돈이 없다구유? 선상님 집에 이천 원이 없대서야, 어찌된 셈이여유? 아 글세 사든 말든간에 우선 보기만이라도 하세유 선상님! 아 참 그려, 현촌꺼정 갈라믄 한시간은 족히 걸리니께 그 복숭아밭 여주인 야기라도 할까유?”
이렇게 말하며 관촌 문방구집 주인응ㄴ 걸으면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려줬다. 쪽빛 하늘은 고추잠자리가 어지럽게 이리저리 날아 다니는 늦가을 오후였다.
그녀는 7년 전에 남편 오인한을 여의었다. 교육이라곤 받지 못했지만 뼈대있는 집안의 규수였으므로, 바느질에서부터 온갖 집안일에 이르기까지 여자로서 갖춰야 할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갖췄다 한다. 얼굴도 흰 편으로 예뻤다. 허나 안된 것이, 그녀의 남편은 젊어서부터 소문난 게으름뱅이인 데다가 술이라면 사양하는 법이 없고, 계집이라면 사죽을 못 썼으니 정말이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내였다. 한다.
게으름뱅이들이 으레 그렇듯이 노름이라면 며칠씩이나 집을 비우고 노름판을 좇아 이리 뛰고 저리 뛴다는 것이다.
오인한은 좀 읽고 쓸 줄도 알고 머리가 나쁜 편도 아니었으나, 부친이 죽자마자 곧바로 유산으로 물려받은 땅에 손을 대기 시작하더니 야금야금 팔아치워버렸다. 오의 부친은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이른바 타고난 농사꾼으로, 가진 거라근 불알 두 쪽밖에 없어 머슴살이로부터 시작해서 자수성가하여 육십 몇으로 죽기까지 자기 손으로 농사 지은 쌀조차 입에 넣어 본 적이 없었다. 수확량이 육칠십 가마가 되었는데도.
Ⅳ. 나오며
이상을 통해 우리는 친일문학의 정의와 친일작가, 그리고 그들의 작품과 친일 행각에 대해 알아보았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라는 치욕스러운 한 시대를 역사에 담아두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선 친일파, 친일파의 후손을 두고 있다. 또 우리의 가슴속엔 일본 제국주의에 무릎 꿇었다는 굴욕감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린 아직 친일이란 문제에 대해 한민족이라면 누구나 자유스럽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중 이 문제에 대해 당당하게 이야기하며 나설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적다. 우리들 대부분은 이 문제에 관해서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이에 소극적이든 적극적으로 동조한 이들의 후손이다.
일전에 선배들과 농담으로 우리가 후대에 친미 사대주의자로 평가받는 것을 가정하고 이야기해 보았다. ‘나이키社의 의류를 즐겨 입었다. 친미주의자다!’ ‘영어는 늘 100점이었다. 친미주의자다!’. 농담의 끝을 장식한 것은 한 선배의 말이었다. “과연 우리에게 당시의 친일파들을 비난할 권리가 있을까? 우리가 그 상황이라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까? 친일이 민족을 위하는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누구하나 이 물음에 대해 속 시원하게 ‘난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이는 없었다.
우리는 외친다. “우리 중 누구하나 친일에 구속받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외침이 잘못이다. 역사엔 가정이 있을 수 없다. 역사는 이미 일어난 사실이며 현재 진행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외침은 누가 누구의 잘못을 탓하려 드느냐가 아닌, ‘이것이 나의 잘못입니다. 이것이 당신의 잘못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우리의 잘못입니다. 이제 반성합시다. 우리의 과거를 살펴보고 그 잘못을 반성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합시다!’ 이어야 한다.
친일 문학을 조사하고 평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민들로 하여금 어두웠던 과거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이제는 친일 작가들의 밝은 면뿐만 아니라 그들의 어두웠던 면들도 보여줌으로써 국민들이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어두운 과거를 다시 꺼내어 생각하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친일 작품들을 읽으면서 자신들이 좋아했던 작가가 그런 작품들을 쓴 것을 보고 충격을 받고 부끄러움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두운 과거일수록 묻어두어서 만은 안 된다. 오히려 과거를 반성함으로써 그것이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친일 작가들과 그들의 좋은 작품들을 모두 매도하자는 것은 아니다. 상당수의 친일 작가들이 한국 문학사의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한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완전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하더라도 심한 생활고와 외적인 압력에 의해 강제로 쓰여진 작품들 역시 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책임져야 하며 함께 부끄러워해야 하고 함께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데 있어 그것을 잊지 말고 앞으로는 다시는 그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친일 문학을 숨기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국민에게 알리고 친일 문학에 대한 반성이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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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과 마찬가지로 2학년 1학기 때 쓴 레포트.
당시엔 제출 기한에 쫓겨 논문들을 짜집고 어거지로 내 생각을 집어 넣느라 몰랐지만,
전역 후에 친일문학선집을 읽으면서 놀란 것은
친일 문학 작품들의 그 빈곤한 사고와 의식이었다.
그저 단순한 일제 찬양과 대동아전쟁 선전, 참전 촉구의 격문이나 다를 바가 없는 그 소설들.
그들이 친일 이전에 보여주던 삶과 사회에 대한 고민과 성찰, 해법 따윈 보이지도 않았던 그 쓰레기들.
그 소설들을 읽으며 분노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지금 여기가 식민지가 아님에 감사드릴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