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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별곡-正>조선에 울려 퍼질 바른 노래
영혼의환
2010. 5. 2. 00:57
하지만 이미 변화는 시작되고 있었다. 두 차례 전란 끝에 사람들은 시대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전란 중에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란 왕과 신하들은 어디에 있었나? 왕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두 전쟁이 남긴 것 중의 하나는 왕권의 돌이킬 수 없는 몰락이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시대의 변화를 느끼며 더 이상 의義와 예禮가 그들의 모든 것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한단 말인가? 다시 예전으로? 아니면 돈으로? 그것도 아니면, 그냥 살아가야 하는가?
그렇게 시대가 서서히 변해가던 시기, 그 지점에서 <한성별곡-正>은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모두 변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어디로 변화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모르던 시기에서 말이다.
시대의 혼란 속에서, 세 청춘이 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시대의 상황에 대처하고 있었다. 나영은 시대 그 자체에 대한 복수를 꿈꾸며 준비하고 있고, 만오는 돈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려 하고 있고, 상규는 그저 시대의 흐름 속에서 부유하면서 살고 있다. 이들 모두는 한때 세상을 바꾸겠단 꿈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 그 꿈의 방향이 어긋나고 있었다. 그들이 꿈꿀 때 지배층에서도 그 꿈을 꾸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상층의 꿈과 하층의 꿈이 서로 만나면서 <한성별곡-正>이 불려지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한성별곡-正>에서 이야기하는 꿈은 결국엔 비극적인 결말을 맺을 수 밖에 없는 꿈들이었다. 그것은 작품 속 모든 인물들의 꿈이 부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러했다. 작품 속 모든 주요 인물들의 꿈은 결국 조선을 위한 꿈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꿈은 누구에게도 지지를 얻지 못하는 꿈이었다.
나영의 꿈은 처음엔 조선을 더 나은 나라로 만들겠단 꿈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 스스로 그런 꿈을 꾸면서도 자신이 그 꿈을 이룰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단지 상규에게 기대어 상규가 꿈꾸는 것이 자신이 꿈꾸는 것이라며 모든 결정을 그에게 맡기고 있다. 그리고 그 소극적인 꿈마저 집안의 몰락으로 꿀 수 없게 되자 그녀는 꿈 대신 복수를 생각하게 된다.
상규가 꾼 꿈의 그 기반이 약했던 것은 자신의 성찰에서 온 것이 아니라, 나영에게서 주입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꿈은 나영이 사라진 후로 꾸지 않게 되었고, 시대의 흐름 속에서 그저 유영할 뿐이었다. 그나마도 다시 나영을 만난 후에도 그의 꿈-나영에게서 주입된 조선을 위한다는 꿈-을 다시 펼치는 대신, 나영을 구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에게 '조선'이란 꿈은 나영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 청춘들 중 그나마 그 꿈의 기반이 가장 튼실했던 것은 만오였다. 그는 이미 노비의 신분에서도 세상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으며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실질적 힘을 가질 수 있는 돈을 선택했다. 그에게는 목표의식이 뚜렸했던 만큼 나영을 위기 상황에서 구해낼 때에도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 그는 살아 남았다.
이들 외에도 꿈을 꾼 자들은 더 있었다. 임금은 새로운 조선을 꿈꾸며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는 쉴새없이 개혁을 향해 달렸고, 벽파와 대립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은 결국 누구도 설득하지 못했다. 그 결과, 그는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그 개혁을 설득하려 했다. 그리고 임금을 죽음으로 몰아 넣은 대비도 꿈을 꾸고 있었다. 그녀의 꿈은 그 누구보다 현실적인 꿈이었다. 왕실의 재건을 통한 조선의 시조로 돌아가는 것.
이들 꿈이 서로 만나면서 비극이 시작되었다. 임금과 나영이 만난 것은 그 비극의 시작이나 다름없었다. 임금의 개혁 정책은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죽음으로 설득을 시도했고, 그 유지를 나영에게 맡겼다. 그러나 그 유지를 받든 나영도 결국엔 임금에게서 어떤 논리적인 설득도 듣지 못했다. 나영의 방향성 없는 개혁과 임금의 설득하지 못하는 개혁이 만나는 그 순간, 이미 나영의 죽음은 예견된 일이었다.
그리고 나영이 죽음으로 향하는 순간에서 결국 상규도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나영이 죽어가던 순간에 상규에게 우리가 꾸는 꿈은 살아선 가질 수 없는 것이냐고 물었을 때, 상규는 답하지 못한다. 그에게 꿈은 나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상규도 자결에 가까운 죽음을 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의 꿈은 나영에게서 만들어졌고, 나영 그 자체가 상규의 꿈이었기 때문에 그 또한 나영을 따라 죽는 수 밖엔 없었다.
결국 정체성 없는-혹은 설득하지 못하는- 꿈들이 져버리고 남은 것은 가장 현실적이며, 방향성 뚜렸한 꿈을 가지고 있던 대비와 만오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꿈을 위해 실질적으로 행동했고, 주변을 설득시켰다. 대비에겐 비밀스런 모임이 있었고, 만오에겐 뜻을 같이하는 행상인들이 있었다. 방법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들은 자신들이 꿈꾸는 이상향을 향해 착실하게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만오의 말, '다 부질 없네'는 의문스럽다. 그러나 만오 그 자신도 그렇게 밖엔 이야기 할 수 없었던 것은, 결국 시대의 흐름은 그의 노력에도 거꾸로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그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의 의지는 최상층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발버둥은 그나마 자신과 가까운 꿈을 꾸고 있던 임금을 죽이는 데에 동원될 따름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비극은 그저 시대의 흐름에 매몰된 당연한 죽음 밖엔 되지 않는가? 아니다. 매월의 뱃속에 있는 아이, 상규의 아이가 결국엔 그 시대의 흐름이 어떻게 흘러갈 지를 바라보게 될 것이고, 그들이 세상을 바꾸게 될 것이었다. 그것은 매월이 상규와 나영, 그리고 만오를 모두 감쌀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세 청춘들의 불안정한 꿈을 본 이이고, 그들의 꿈을 보듬어 줄 줄 아는 인물이었다.
결국 한성별곡은 단순한 서울의 노래가 아니라, 시대의 흐름 속에서 매몰된 인간 군상들에 대한 노래였다. 그리고 正은 그 노래가 바른 길로 가게 될 것이라는 암시였다. 지금의 우린, 그 노래를 제대로 부르고 있는가?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블로그 내 관련 글 : <한성별곡-正 인물 관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