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의 독특한 풍자 기법
정이현 소설의 특징 중에 하나는 대개의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점이다. 그녀 소설 속의 여성들은 자신들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이용할 줄 안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주인공 또한 여성으로 자신의 처녀성을 이용하려는 치밀함을 보인다. ‘나’는 여대생으로 결혼의 잣대로 남자들을 요리조리 재어본다. 그녀는 ‘한방의 역전’을 위해서 남자들과의 혼전 성관계도 마다하고, 정말 어쩔 수 없을 때에는 오랄이라는 ‘최선의 해결책’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녀의 노력은 첫 경험에서 순결의 증거-피-가 발견되지 않으면서 허물어진다. 책은 ‘나’가 우린 서로 사랑하고 있으니 괜찮을 것이라며 자신을 위로하면서 끝난다.
정이현 소설 속의 그녀들은 현대 사회의 윤리적 문제에 대해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돌파하고 있다. 그녀들은 겉으로 보기엔 매우 깔끔하며 주변으로부터 칭찬받을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나’처럼 수줍음 많고 착한 여대생, 「트렁크」의 ‘나’처럼 성공한 커리어우먼 등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있다. 그리고 그녀들은 자신의 위치를 위해 사회적 가치관이 보호해 주는 여성성을 교묘하게 이용해 나간다. 난 이런 점에서 정이현의 소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1990년대를 기점으로 우리 문단에 여성작가들은 폭발적인 주목을 받게 된다. 민주화의 기점으로 시작된 여성 발언권의 확대와 연관된 현상일 것이다. 당시 가장 주목할만한 소설은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일 것이다. 가부장적 체제에 대한 여성의 도발이라는 파격적인 주제에서 시작한 이 여성 소설은 당시 대중의 주목을 한 몸에 받게 된다. 이상적인 아버지 상으로 대변되는 중견 남성 배우를 강금한 여성의 이야기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후 많은 여성 소설들은 남성중심적인 사회를 향해 돌을 던졌다. 돌을 던지는 방식은 다양했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처럼 정면으로 돌을 던지기도 했고, 은희경의 『아내의 상자』처럼 소외된 여성에 대해 담담한 어조로 성토하는 소설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소설들의 특징은 여성이 어떻게 억압받았는가에 대한 고발과 도전적 소설일 뿐 어떤 현실적인 대처를 하고 있는지, 혹은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에선 부족한 점이 있었다.
하지만 정이현의 소설은 여성의 이야기, 특히나 가부장 제도로 대변되는 우리 사회에 속한 여성들이 어떻게 이 사회를 이용하며 자신들의 지위를 높이는지 적나라하게 이야기한다. 정이현의 소설 속에서 ‘나’로 등장하는 여성들은 가부장적 제도가 요구하는 여성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순결하며, 다소곳하고, 아름답고, -신가부장제가 요구하는 대로-능력 있으며, 자기 남자 앞에선 요부처럼 굴고, 남성에 대한 적대감도 없다. 외형적으로 그녀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누구나 꿈꾸는 완벽한 여성이다. 그러나 그 안을 들여다보면 그녀들은 제도순응이라는 양의 탈을 쓴 “여우” 그 자체다. ‘나(들)’은 한방의 인생역전을 위해 순결을 이용하고, 직장상사와의 은밀한 관계를 통해 주변의 일을 해결해 나가며, 직간접적으로 남편을 죽이고 경제적 부를 늘여나가고, 위장 납치를 꾸미고, 기혼녀와의 동성애를 즐기는 등 양의 탈 아래의 “여우”는 가부장사회가 거부하는 일들을 서슴지 않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그녀의 소설이 소설적 허구성과 과장이 가미되었을 뿐, 21세기 초 대한민국 여성들이 사회에 어떻게 적응하고 있는지를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성 인권이 확대되었다지만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은 여전히 부당한 프레임 안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에 강하게 대응하는 여성들에게 남자는 “여자가 어디!”라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과정 속에서 현명한 –혹은 영악한- 여성들은 이를 이용한다. 정이현 소설 속 ‘나’처럼 제도를 순응하면서 이 제도를 이용해 나간다. 그녀는 현대 사회의 여성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 그리고 그 포착한 사실을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쿨한 태도로 서술해 나간다. 그 “쿨”한 서술 덕분에 그녀의 소설은 고발문학이 아니라, 통렬한 풍자가 되고 한편의 재기 발랄한 칙릿 소설의 형태까지 띄게 되었다. 결국 그녀는 “내츄럴 본 쿨 걸”이라는 그녀의 주장만큼 재기 발랄한 문체로 여성이 바라본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콕콕 찌르고 있다. 기화가 된다면 그녀를 한번 꼭 만나보고 싶다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아니면 그녀의 책을 읽은 모두의 생각일까?
덧. 얼마전 YES24에서 박완서, 정이현 두 작가와 독자들의 만남을 주선한 적이 있다. 나 또한 그 이벤트에 응모했지만, 떨어졌다. 아마도 나처럼 그 두 분을 만나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은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