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
<정병욱의 증언>
동주가 졸업 기념으로 자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엮은 자필 詩稿(시고)는 3부였다. 그 하나는 자신이 가졌고, 한 부는 이양하 선생께, 그리고 나머지 한 부는 내게 주었던 것이다. 이 자선 시집에 실린 19편의 작품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쓴 시가 <별 헤는 밤>으로 1941년 11월 5일자로 되어 있다. 그리고 <서시>를 11월 20일에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이로 보아 알 수 있듯이 <별 헤는 밤>을 완성한 다음 동주는 자선 시집을 만들어 졸업 기념으로 출판하기를 계획했었다. <서시>까지 붙여서 친필로 쓴 원고를 손수 제본을 한 다음 그 한 부를 내게다 주면서 시집의 제목이 길어진 이유를 <서시>를 보이면서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서시>가 되기 전) 시집 이름을 <병원>으로 붙일까 했다면서 표지에 연필로 ‘병원’이라고 써넣어 주었다. 그 이유는 지금 세상은 온통 환자 투성이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리고 병원이란 앓는 사람을 고치는 곳이기 때문에 혹시 이 시집이 앓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느냐고 겸손하게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니까, 시 <병원>에 나타난 ‘병원’은 병의 진단도 제대로 못하는 가짜 병원이지만, 시집 ‘병원’은 마음이 아픈 사람을 근원적으로 치유해 주는 진짜 병원인 것이다. 마음이 아픈 사람들은 이 시집을 펼쳐서 읽으면 된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을까? 시인 자신이 먼저 병을 앓았고, 또 스스로 그것을 치유했기 때문이다. 시 <병원>은 바로 시인 자신이 지독하게 병을 앓는 모습을 보이면서, 그 치유 가능성을 내비친 작품인 것이다.
- 시간적 배경 : 금잔화가 피는 초가을 오후의 한나절
- 공간적 배경 : 살구나무가 있고 화단이 있는 병원 뒤뜰(병원 안이기도 하면서 밖이기도 한 공간)
- 상황 : 가슴을 앓는다는 젊은 여자가 일광욕하다가 금잔화 한 포기를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졌다. 여자는 관찰의 대상인데 비해 화자의 내면은 깊숙한 곳까지 과감히 열어보이고 있음. 여자와 나는 서로 안팎을 이루는 표리의 관계임. 즉, 여자는 나의 내면이 된다. 나의 내면은 시련, 피로, 인내 등의 어휘로 집약되는 고립되어 있는 내 존재 그 자체.
- 근거 : 1연-여자의 모습과 여자의 정황 묘사→2연-나에게 닥친 시련과 피로, 인내의 토로→3연-나의 내면과 내면의 내면이 만나 근원적 자아의 회복을 염원.
나 스스로는 내가 병이 들어 있단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의사는 내게 병이 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관계의 역전이 일어난다. 늙은 의사야말로 정녕 깊이 병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 전체가 거대한 병원이다. 이 거대한 병원에는 자신에게 병이 있는 줄도 모르는 환자들로 가득하다. 마음의 병, 정신의 병, 영혼의 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파하지 않는다.
이런 환자들로 이루어진 이 세상을 만나면서 ‘나’는 또 하나의 아픔을 갖게 된다. 사람들이 병을 모른다는 것,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나’를 아프게 한다. 병을 치료하러 병원에 갔다가 다른 병까지 더 얻게 된 것이다. 이건 나에게 ‘지나친 시련’이다.
하지만, “나는 성내서는 안된다.” 지금까지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았듯이 나는 또 참아내야만 한다. 끝까지 참아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존재 조건이기 때문이다. 슬퍼하는 자에게 복이 있는 것은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팔복>)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내’가 걸어가야만 할 길이다.
늙은 의사에게 병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병원을 나오려던 ‘나’는 ‘젊은’ 여자가 병원 뒤뜰에 누워 일광욕을 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이 여자는 뚜렷이 대상화될 수 있는 현실적 존재로서의 어떤 여자가 아니다. 이 여자는 ‘나’의 내면 저 깊은 곳에서 걸어 나온 나의 영상과도 같은 여자이다.
‘병원 뒤뜰’은 병원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 병실 바깥에 있는, 병원에서도 더 깊숙한 안쪽의 공간이다. 이런 공간에서 여자는 ‘한나절이 기울도록’ 일광욕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자신의 내면을, 아니 내면의 내면을 그렇게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자기 성찰이 끝없이 이어졌음을, 그리하여 “내”가 자신의 가장 깊은 저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는 근원적 자아에 아슬아슬하게 도달하려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나’의 ‘지나친 시련’과 ‘지나친 피로’는 여자가 가슴을 앓는 것과 잘 대응된다.
그러나 ‘한나절이 기울도록’ 기다려도, 이 여자를 위로하러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이 철저한 고독은 너무 슬퍼서 이젠 슬프다고 할 수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살구의 시큼한 맛, 그것은 나비가 꽃을 볼 때 느끼는 본능적 감각에 해당된다. 그런 살구나무, 지나치게 슬퍼서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일지 않는다. 바람조차 없다는 것은 ‘병원 뒤뜰’이 외계로부터 철저히 고립되어 있음을 뜻한다. 나비도 날아오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는 병원 뒤뜰에서 여자는 어떤 위로도 받을 수 없고 어떤 다른 생명과도 소통할 수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만 한다. 여자는 병원 뒤뜰에 누워, 하늘과 땅으로부터 생명력을 부여받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한나절 내내 일광욕을 하던 여자는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난다.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다시 병원으로, 이 세상으로,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자아를 망각한 상태에 빠져 있다가 문득 의식 세계로 돌아온 것이다. “내”가 문득 제정신으로 돌아와 현실감각을 되찾은 것, 이것이 여자의 이미지 속에서는 여자가 옷깃을 여미는 것으로 외면화된 것이다.
그러나 햇볕을 쪼이며 생명력을 부여받던 한나절의 시간을 불시에 떨쳐버릴 수는 없다. 그래서 여자는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는다. 하늘과 땅 사이의 수직적 소통 한가운데에서 생명력을 부여받아 피어난 것이 꽃이다. 따라서 여자가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는 것은 한나절 내내 즐기던 일광욕의 연장선 위에 놓이는 행위이다.
여자가 사라지고 나자, ‘나’는 여자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여자가 병실 안으로 사라졌다는 것, 그것을 ‘나’ 중심으로 다시 생각하면, 병원 뒤뜰에 누워서 수직적 소통 사운데 있던 ‘나’의 무의식이 의식으로 바뀌어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깊은 곳(내면의 내면)을 들여다본 의식적 자아인 ‘나’는 그 체험을 잊을 수 없다. ‘나’는 의식적으로라도 ‘내’가 본래 있어야 할 자리, 수직적 소통이 가능한 자리로 다가가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이 끝부분에 이으로 앞에서 ‘젊은 여자, 이 여자, 여자, 그 여자’로 지칭되었던 대상이 ‘그’로 바뀐 것은 따라서 의미심장하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 자리에 누워보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그 여자’와 합일되는 것, 그래서 근원적 자아를 찾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병들어 있음을 알고 아픔을 오래 참으며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살핀다는 것, 그리하여 <병원>과 같은 시를 TMs다는 것, 바로 이것이 이 시인의 치유방법이었던 것이다. ‘나도 모를 아픔’의 치유는 이렇게 깊고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 깊고 깊은 곳에 여자가 있고 꽃이 있었던 것이다. 가슴을 앓는 여자가 꽃을 따서 가슴에 꽂은 것은 따라서 아픔을 오래 찬아 오던 시인이 이 시를 쓴 것과 같다. 그러기에 이 시의 제 2연 첫머리에서 말하는 ‘나도 모를 아픔’은 그것이 비록 일제 말기라는 시대적 현실에서 온 것이라 해도, 그런 시대적 아픔을 뛰어 넘는 어떤 근원적인 아픔을 포함한다. 그것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려는 안간힘, 그것이 이 시에서 일광욕을 하는 젊은 여자로, 그 여자가 꽃을 따 가슴에 꽂는 것으로, 그리고 ‘내’가 여자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보는 행위로 나타난 것이다.
- <병원> 이하의 내용은 가톨릭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류양선님의 논문 「윤동주의 <병원> 분석 - 산문 <화원이 꽃이 핀다>와 관련하여」에서 "시대적 질환과 치유에의 기원 ; 시 <병원>"부분을 요약한 것입니다. 이하 내용은 모두 수업 중 시 해석을 위한 교육적 목적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본문으로]
'국어교육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언어영역 오답 노트 만드는 법 (0) | 2011.03.22 |
---|---|
<창조> 동인의 예술관과 이광수 (1) | 2011.03.10 |
수능 언어영역 40가지 유형 (2) | 2011.03.03 |
박수자, 『읽기 교육의 원리와 방법』요약 (0) | 2010.12.19 |
<온달전>을 통해 본 설화의 서사구조와 전승 양식 (1) | 2010.1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