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에서 경향까지― 이태준의 문학세계
9조: 전oo, 정oo, 정oo, 정oo
Ⅰ. 들어가며
이태준. 호는 상허(常虛)·상허당주인(尙虛堂主人). 1921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조치대학[上智大學] 예과에서 공부했다. 귀국한 뒤로는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 〈중외일보〉·〈조선중앙일보〉 기자로도 활동했다. 1933년 구인회 회원으로 가입했고, 1930년 말에는 〈문장〉의 소설 추천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최태응·곽하신·임옥인 등을 배출했다. 8·15해방 후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임화·김남천 등과 조선문학건설본부를 조직하여 활동하다 월북했다.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 국가학위수여위원회 문학분과 심사위원 등을 역임했다. 1947년 방소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소련기행에 나섰고, 6·25전쟁 때는 북한의 종군작가로 참가했다. 1953년 남조선노동당 인물들과 함께 숙청될 뻔했으나 가까스로 제외되었고, 1955년 소련파가 숙청될 때 가혹한 비판을 받고 숙청되었다. 함경남도 노동신문사 교정원으로 일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1953년 숙청이 끝난 가을 자강도 산간 협동농장에서 막노동을 하다 1960년대 초에 병사했다는 증언도 있다.
1925년에 시골여인의 무절제한 성생활을 그린〈오몽녀 五夢女〉(시대일보, 1925. 8. 13)로 등단한 뒤, 여러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그는 특히 문학의 자율성과 언어의 정련(精練)을 강조해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몇 번을 되풀이해 고쳤는데, 이런 점에서 그의 소설은 한국문학사에서 소설의 기법적 완숙과 예술적 가치를 높인 것으로 평가된다. 해방 후에는 초기와는 달리 정치·사회현실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선전·선동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해방 직후의 어지러운 상황에서 자신의 이념적 변화를 형상화한〈해방전후〉나 북한의 토지개혁 과정을 그려낸〈농토〉등이 그러한 작품이다.〈달밤〉(1934)·〈구원의 여상〉(1937)·〈화관〉(1938)등의 소설집과 수필집으로〈무서록 無序錄〉등이 있고 이 외에 한 시대의 뛰어난 저서로 평가받은〈문장론〉·〈문장강화〉가 있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인기작가이며 문단의 헤게모니를 장악했던 이태준에 대한 평가는 남북한 모두에서 미비한 것이 실정이다. 남한에선 월북작가라는 이유로 1988까지 그의 작품과 그에 대한 이야기가 금기시 되었으며 북한에서도 한국전쟁 이후 남로당의 숙청과 더불어 그의 문학사적 위치를 호되게 몰아세우며 그에 대한 연구가 전면 중단된 상태이다.
이에 우리는 이 발표문을 통해서 이태준의 작품과 문학활동을 통해 이태준 자신과 그의 문학관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Ⅱ. 문학 활동과 문학관
1) 작품 속의 삶의 반영, 경제적 빈곤과 사회의 냉대
이태준의 생애와 문학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간과 할 수 없는 것이 그의 고아체험과 빈곤했던 초창기 문학 활동 시기의 체험이다. 그의 부친 이창하는 당시 상당한 식자층에 속했던 사람으로서, 나라를 개혁하려는 일을 도모하다 실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한 개화당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태준의 부친은 개화파라는 이유에서 친일분자로 오인되어서 그의 일가는 1909년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톡으로 떠나지만 그곳에서 아버지는 폐결핵이 도져 이태준이 6살 되던 해에 이국 땅에서 타계한다. 그 후 고국으로 돌아오지만 1912년 겨울, 이번엔 그의 어머니마저 죽게 되어 그들 세 남매는 졸지에 고아가 된다. 이때 이태준의 나이는 9살이었다.
이후 태준은 고향인 용담의 친척집에 맡겨지지만 자신들의 생활의 불편함과 주위의 동정 따위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고있던 그는 매우 반항적인 기질을 보였고, 1915년 안협의 당숙댁에 양자로 보내지지만 심한 괄시로 오래 머물지 못하고 다시 용담으로 되돌아온다. 1920년 배재학당에 응시, 합격했으나 입학금이 없어 등록을 못하고 배회하다가 이듬해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어렵게 학비를 조달하며 다니게 되지만, 학교의 비리와 횡포에 대항하여 일어난 동맹휴교 사건에 주모자로 관여하게 되어 퇴학당한다. 이후 친구의 도움으로 일본 에 유학하게 된 이태준은 신문, 우유배달을 하는 등 매우 어려운 생활 속에서 1925년「오몽녀」를 집필한다. 그의 동경 생활은 한마디로 가난과 병고, 그리고 고독감으로 점철된 매우 암담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태준은 이같은 어려움을 끝내 감내하지 못하고 1927년 상지대학(上智大學)을 중퇴하고 귀국길에 오른다. 서울에서 그는 여러 신문사와 모교인 휘문고보에 취직을 의뢰했지만 냉담한 반응뿐 누구 하나 반겨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파고다 공원 주위를 서성거리며 방황한다. 이와 같이 고아체험,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냉대의 경험 등 순탄하지 못한 그의 생활의 경험은 그대로 그의 소설에 반영되어 나타나는데「고향」,「감사」,「사상의 월야」등의 여러 소설에서 그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서사구성이 나타나고 있고 이러한 체험들은 이태준의 소설 미학에서도 반영되어 나타난다.
2) 순수문학의 기수, 구인회와 《문장》활동
이태준을 순수문학의 ‘기수’라 하는 것은 바로 순수예술 운동을 추구했던 구인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으며, 일제 말기 순수문학의 연장선에 놓이는《문장》의 주간, 편집인이었다는 데에 연유한다. 구인회와 《문장》이 바로 순수문학의 대표격이었기 때문이다. 구인회는 카프에 대한 검거가 몰아치던 1933년 8월, 이태준, 정지용, 박태원, 이효석, 이상 등 작가 9명이 경향문학에 반대하여 순수예술 추구를 취지로 결성한 문학친목단체로, 카프와는 달리 조직적인 단체로서의 집약된 목소리를 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문단에 순수예술옹호라는 분위기를 형성했다. 활동은 비교적 소극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 이후의 민족문학의 주류를 형성하는 데에 이바지하고, 근대문학의 성격을 현대문학의 성격으로 전환, 발전시킨 점에서 문학사적인 가치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구인회의 순수문학운동의 선두에 섰던 사람이 바로 이태준으로 그는 구인회의 결성에서 활동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자세를 보였다.
한편 일제의 식민통치가 민족말살정책이란 극한상황으로 치닫는 1939년 2월에《문장》이 탄생한다. 《문장》은 꾸준히 친일적인 색채가 비교적 덜한 순수문학을 지향함은 물론 전 문단인을 망라하는 월간문학지로 발돋움한다. 서구문화의 도입과 신인발굴에도 일정한 공로가 있으나《문장》이 주력한 것은 국문학 고정의 수록을 통한 민족문화유산의 옹호 전파로 이는 이변기의 취향은 물론 이태준과 정지용의 순수문학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이태준은 이《문장》의 주간편집인으로, 9명의 회원인 구인회의 좌장격이 아니라, 전 문단인을 망라하는 문예지의 실질적인 소유자가 되어 문단의 헤게모니를 잡게 된다.
이처럼 ‘순수문학의 기수’라 할 때에, 이태준이 주창한 순수란 무엇인지 스스로가 자신이 주창한 순수와 관련하여 그 개념을 밝힌 글이 없음에 따라 그가 주창한 순수의 개념을 그의 수필, 소설 등의 작품과 문단활동에서 유추할 수밖에 없는데, 이때 이태준의 순수는 다음과 같이 세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카프에 대한 반발, 즉 문학의 이념편향성, 도식성, 혹은 공식성에 대한 반발로서의 순수이다. 여기서 이념편향성에 대한 반발이라 함은 경향파의 이념만이 아니라 이광수로 대표되는 문학의 계몽성에 대한 반발로도 해석할 수 있으며, 이는 김동리, 현경준, 정비석, 박노갑 등 신세대에 연결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바로 미적 자유로서의 순수이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을, 내가 쓰고 싶은 때에, 내가 쓰고 싶은 투로, 쓰는 것’이 바로 순수한 것이라는 요지이다.
둘째, 도시화 산업화에 대한 반발에서 나오는 옛것에 대한 애착으로서의 순수이다. 이태준은 그의 삶과 소설 속에서 유난히 옛것에 애착을 보였고, 수필에서도 자신의 골동품 취향을 자랑하고 있다. 이것은 이태준이《문장》에서 국문학 고전의 발굴에 주력한 것과도 연관된다. 물론 이러한 것을 순수라 지칭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 있을 수 있으나, 그의 소설과 수필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인식적인 면에서, 바로 옛것에 대한 애착으로서의 순수라 할 수 있다.
셋째, 언어와 문장에 대한 자각으로서의 순수이다. 이태준은 여러 차례에 걸쳐《문장》에「문장강화」를 연재하면서 우리말에 대한 관심을 보였고 이는 당시 우리말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이태준은 그의 소설 속에서 우리말에 대한 자각은 물론 단어 하나에까지 관심을 보이며 문장을 다듬었다. 이러한 문장에 대한 관심은 그가 소설에서 사건의 구성보다는 인물의 창조에 주력한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경향문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립투쟁의 사건보다는 소설에서 인물을 창조하는 데에 이태준은 그의 모든 문장력을 동원하였다. 이러한 언어 혹은 문장에 대한 자각을 통해 그는 그의 소설 속에서 아이러니, 서정적 분위기를 창출함은 물론 선명한 인간상을 창조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 경우 이태준의 순수는 사건보다 언어와 문장에 대한 관심으로서의 순수이며, 이것은 소설의 기교와도 연결된다.
3)『문장강화』, 모더니즘 미학의 기반
이태준의 문장관, 혹은 더 나아가 그의 문학관은 1939년부터 쓰여진『문장강화』에 잘 드러나 있다. 『문장강화』에는 그 자신의 개인적인 문학관은 물론이고 비슷한 시기에 동일한 문학관을 표방했던 여러 문인들의 언어관까지도 담겨있다. 그 문인들은 대부분 〈구인회〉를 중심으로 활동한 사람들인데, 가령 박태원, 김기림 등의 모더니즘 문필가들이 그들이다. 그런 점에서『문장강화』는 그저 말의 기술적 표현을 꼼꼼하고도 체계적으로 다룬 일반적인 문장작업 혹은 개괄적인 해설서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해, 그 책은 문장작법에 대한 개괄적 설명 이외에도 그 당시의 모더니즘 문필가들의 문학관을 알게 모르게 정당화하고자 하는 의도 도 또한 가지고 있다.
이태준은『문장강화』에서 올바른 글쓰기라면 두 가지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 문장어를 의식한 고답적인 글의 경계와 또 말하듯이 쓰더라도 아무런 의식적 자각이나 기술적 통제의 여과 없이 일상적인 용어법 그대로 쓰여진 평범한 구어의 극복이다. 그에 바탕해서 그는 가장 현대적인 개성 있는 문장이 지향하는 바를 한마디로 요약하는데, 사물에 대한 정확하고도 극명한 지각이 그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감각적인 명료성의 획득이 현대 문장의 제 일차적 목표가 된다는 것인데 그를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이태준은 대략 세 가지를 제시한다. 일물일어설과 감각적인 운용 및 사물에 대한 개성적 접근이 그것이다.
일물일어설이란 주어진 표현 대상에 다가서는데 있어 매우 엄정한 태도를 취하는 것과 관련된다. 즉, 그것은 유형화된 표현방식으로 어떤 상황이나 사물을 대충 막연하게 인지하고 넘어가지 않는 태도, 곧, 한 가지 상황에는 그 상황에 적합한 단 하나의 표현 방법만이 있다고 생각하는 엄격한 글쓰기 자세를 뜻한다. 그리고 언어의 입체적인 개발이란, 말에는 단순히 뜻 이외에도 그 나름의 ‘감정과 체격과 신원’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여 그 말을 여러 측면에 -가령 음운론적인 측면과 형태론적인 측면에서- 다층적으로 개발하고 이용해야 함을 뜻한다. 이태준에 의하면 ‘뜻 이외에 그 언어, 문자가 발산하는 체취, 분위기, 그것을 선이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편, 이태준은 사물에 대한 개성적인 접근을 힘주어 강조하는데, 그것은 사물을 늘 보는 대로 바라봄으로써 연유된 지각의 상투화를 막고 사물을 가능한 한 관찰한대로의 생생함으로 그려내기 위해, 이른바 예술가는 늘 주의를 사물에 집중하고 또 신선한 표현방식을 지속적으로 개발해야 함을 뜻한다.
글을 쓰는 데 있어 이태준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사물이 얼마나 가치있느냐 하는 것보다, 혹은 세계관의 측면에서 이념적으로 그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보다, 비록 주어진 대상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것을 작가가 얼마나 실감나게 구상화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무런 화제거리가 될 수 없는 하찮고 가벼운 소재라도 감각적인 명료성만을 획득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글의 기본 요건은 충족된다는 것이 이태준의 생각이다. 이처럼 소재 그 자체의 무게보다 어떠한 것이든지 감각적으로 정교하게 처리하는 기술적 방법이 우선적으로 주목되어야 한다는 발상은 김기림과 박태원에게서도 똑같이 발견된다. 이들이 창작함에 있어 무엇보다 절실하게 느낀 부분은 창작 재료의 무게보다 그것을 적절히 다루는 기술적 수법으로 그 기술적 수법을 통해 그들이 얻고자 한 것은 소재의 사회, 역사적 가치보다 그것의 감각적 투명함이다. 이러한 사실과 관련하여 이태준을 비롯한 박태원, 김기림은 철저히 ‘도구적인 지성’의 개발에 집착한다.
도구적인 지성이란 어떤 이념 체제나 낭만적 상상력의 유입 없이 주어진 소재나 현상을 단지 기술적으로 정갈하게 제시하려는 고도로 의식화된 기교적 방법 그 자체를 일컫는다. 이태준의 경우, 특히 금속성의 정확함과도 같은 치밀한 배려나 의식적인 계산이 언어에 끊임없이 가해질 때, 현대적인 문장이 이룩된다고 보고 기술의 계속된 수련을 강조한다. 이태준은 이상의 몇 가지 기술적 실천 위에서 무엇보다 대상의 명료한 재구를 작품 속에서 기획하는데, 그 기획이 어디까지나 주어진 대상을 단지 기술적으로 적절하게 처리하는 방법적인 것에만 걸쳐 있다는 것에 주목할 수 있다. 이 점은 이태준 뿐만이 아니라 박태원이나 김기림에게서도 분명하게 나타나는 사실이어서 그들이 서 있는 문학적 지반의 공통점이 무엇인지를 확연하게 드러낸다. 즉, 자신을 둘러싼 현실적 배경의 사회, 역사적 의미보다 그 배경의 감각적 천작에 이태준과 다른 모더니즘 문필가들의 공통점이 놓여 있다. 그들은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현실 존재의 부인할 수 없는 실재성을 확인함으로써 자신들에 대한 현실적 간섭을,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사실로서 받아들인다.
4) 단편과 장편, 상반된, 그러나 같은...
이태준은 처녀작인「오몽녀」를 비롯하여 해방 이후 북쪽으로 넘어 갈 때까지 50여 편의 단편소설과 8개의 단편소설집을 출간하는 등 활발한 창작 활동을 하였다. ‘한국 단편의 완성자’라는 수식어는 이태준에 대한 평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이태준이 ‘반영으로서의 문학’이 아닌 ‘기교로서의 문학’에 능했다는 것이며, 그가 사회 혹은 역사에 대한 관심보다는 작품의 완성도에 더 주력한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이태준은 스스로 단편에 대한 애착과 ‘예술로서의 단편’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단편 우위의 관심은 자연 그가 단편에 주력하는 결과를 빚었고, 그의 데뷔작인 「오몽녀」에 대한 논의에서부터 이태준 소설의 기교에 대한 평가가 시작된다. 「오몽녀」에 대한 평가는, 나도향은 ‘구상과 기교가 그리 완숙하였다고 할 수는 없으나 서투른 점을 별로 찾아낼 수가 없다’고 했고, 양백화는 ‘구상도 좋거니와 그 필치도 비교적 유창하여 성공한 작’이라 했으며, 방인근은 ‘건실한 필치, 치밀한 묘사와 구상, 현실을 예술화하여 실감을 주는 작자의 수완과 정신, 어떤 점으로 보든지 성공한 작품’이라 평했다. 주제의식 혹은 역사의식이 아니라 모두가 소설의 기법과 관련된 이러한 평가는 이후 이태준 단편의 해석에 하나의 전형이 된다.
1938년 백철의 평가에서부터 1980년대 이재선, 정한숙 등에 이르기까지 이태준 소설의 특징은 선명한 인물 창조로 모아지며, 이는 그의 소설을 이해하는 하나의 틀로 굳어진다. 특히 이재선은 그의 소설사적 위치를 김동인이나 현진건의 뒤를 이은 뛰어난 단편작가로 평가하면서, 그의 업적으로 가장 먼저 지적한 것이 ‘근대적인 단편소설의 한 완성자’라는 것이다.
한편 이익성은 구조주의적 방법론에 입각하여 이태준의 콩트와 단편을 분석, 그의 소설사적 의의를 묘사력, 분위기 창출, 선명한 인간상이라 지적하고 있다. 이는 그후 이태준의 작품에 대한 논의에서 거의 예외없이 적용되었고, 그의 계속적인 퇴고 과정이 밝혀지면서 더욱 확고하게 ‘단편의 완성자’, ‘기교의 작가’로 평가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태준의 중기소설 특히 1930년대 후반 이후의 소설의 경우에는 다른 평가도 있을 수 있다. 이들 평가들은 이태준을 단순히 기교로서의 문학이 아닌 반영으로서의 문학으로 평가할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이들의 논지는 이태준을 단순히 순수문학자로만 볼 것이 아니라, 일제시대 이후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과 부정의식을 꾸준히 견지하고 있었던 작가로 보아, 이런 점에서 비판적 리얼리즘에 근사한 것으로 평가하자는 것이다.
특히 강진호는, 깊은 현실인식을 전제로 한 작품들이 후기에 많이 산출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태준의 단편에 사회성이 없다는 견해는 부정되며, 그의 작품은 후기로 갈 수록 사회에 대한 인식이 깊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이 광복 후 그의 정치활동을 예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고 해석하고 있다.
문제는 이태준의 소설을 기교냐 반영이냐 하는 이분법적으로만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국 단편의 완성자라는 기교를 인정하면서도 그에 수반되는 이태준의 현실인식의 수준이 함께 평가될 때에 이태준의 단편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이루어질 것이다.
이와 같이 이태준에게 있어서 소설이라 하면 곧 단편을 이른 것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단편의 비중과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태준 자신 역시, ‘예술과 문학을 논할 때의 그것은 단편소설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라고 말했다. 이런 의미선상에서 보면, 그의 장편은 보잘것없고 초라할 뿐이다. 하지만, 장편소설 역시 부정할 수 없는 그의 분신이며 그의 손끝에서 쓰여진 작품인 이상, 근 15편에 해당하는 그의 장편을 논외로 친다는 것은 이를 너무 간과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태준은 『무서록』에 있는 <조선의 소설들>이라는 항목에서 소설을 크게 ‘시키는 소설’과 ‘쓰는 소설’로 나누고 있다. 여기서 ‘시키는 소설’이란 연재소설을 의미하며, 문학성 내지 작품성을 등한시한 소설을 말한다. 이에 반해 ‘쓰는 소설’은 연재 조건과는 무관하게 쓰여진, 즉 작가가 작품성을 고려하면서 쓴 소설이다. 이것은 이태준의 단편소설이나 전작소설 등에서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이태준의 장편 연재소설들은 ‘시키는 소설’에 속한다. 이태준은 연재소설의 특징상 독자들의 흥미와 관심을 끌기 위한 방안으로, 연재소설의 단 한 회를 보고도 다음 회를 기다리거나, 신문이나 잡지를 구독할 수 있게 하는 ‘일회성’에 강조를 둔다. 이 ‘일회성’의 구체적인 방안을 그는 소설 속에서 인물들의 애정대립과 갈등에서 오는 삼각관계에서 찾고 있다. 이는 ‘시키는 소설’의 역할로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위에서 이태준은 자신의 연재소설을 스스로 ‘시키는 소설’에 분류하고 그에 충실하게 연재를 하지만, ‘쓰는 소설’에 대한 미련을 평생 동안 저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연재소설에도 ‘쓰는 소설’의 지향의지를 반영시켰다. 이는 다른 통속작가와는 엄연한 차이점을 가져야 할 자신이 아닌가에 대한 이태준 스스로의 자존심이 강하게 작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한편, 그는 그러한 지향의지의 구체적인 방안으로 연재소설 속에 독자에게 줄 교훈을 실었다. 그리고 그 교훈은 작품 속에서의 계몽성이라는 모습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장편소설 중에서 『황진이』와 『왕자호동』은 역사소설에 속한다. 『황진이』는 역사소설이 다량으로 산출되었던 그 시기에 쓰여졌다는 점에서, 『왕자호동』은 이태준이 절필을 하고 낙향하기 바로 전에 썼다는 점이 눈 여겨 볼만하다. 여기서 그가 역사소설을 쓴 이유는 일제 강점기라는 어두운 시대에 정면으로 대결하거나 도전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취할 수 있는 문학적 태도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사상의 월야』는 이태준의 장편 중 유일하게 자전적 소설에 속한다. 이 작품은 두가지 큰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개작문제에 따른 작가의식의 변모, 고아의식으로 총칭되어 질 수 있는 자전적 소설로서의 의미가 그것이다.
정리하건데, 그의 장편은 ‘일회성’을 지닌다. 그의 장편은 이미 연재소설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신문사 측의 요구와 독자들의 흥미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쓰는 소설’로의 지향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역사소설에서 그는 과거의 역사적 사건과 간극을 유지하면서 일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분출하기도 하고 우리 민족의 재발견을 통한 민족성 회복을 꾀하였다고 볼 수 있다.
5) 월북, 방황과 좌절
해방 후 그는 순수문학을 지향하던 지금까지의 문학적 태도와는 달리 좌익계열의 문학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한편,「해방전후」를 발표하면서 일대 사상적 전환을 보이며 임화에 앞서 홍명희와 함께 1946년 월북하였다. 그의 자전적 소설인「해방전후」는 크게 두 개의 이야기로 되어 있다. 하나는 해방 전의 행적을 회고하는 부분이며, 다른 하나는 해방 후의 심경과 <조선문학건설본부>에 관여하게 된 경위를 서술한 부분이다. 이러한 두 개의 이야기를 통해 식민현실에 대한 자신의 태도와 해방 후 변모의 심리적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월북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나오고 있는데, 조용만은 상허가 ‘지사적 영웅심 때문에 문단의 헤게모니를 쥐려고 좌익으로 돌아섰다’고 증언하고 있고, 최태응은 단순히 ‘인민재판을 받고 징역을 살게 된 옛 친구 홍진식을 위해 장기간 구명 운동을 펴기 위해 평양으로 갔다’고 상허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으며 백철은 ‘좌익계 인사인 이여성, 임화 등과 일제 말기부터 가깝게 지내다 이들과 같이 문학 건설본부의 선두에 서게 된 후, 남한 과도 정부의 부패한 현실에 작가적 결벽성으로 불만을 갖게 되어 월북하게 된 것으로 안다’고 말하고 있다. 반면에 이기봉은 상허의 월북 후의 작품을 들며 최태응의 입장에 강한 회의를 나타내고 있다.
북으로 간 그는 ‘방소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8월 10일부터 10월17일까지 약 2개월간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등지를 돌아보고 와서 기행문집『소련기행』(1947)을 남한에서 먼저 출간한다. 이로 말미암아 성향이 모호하던 그는 사회주의자로서의 공식적 입장을 분명히 표명하게 됨으로써 남하의 길이 막히고, 자연 평양에 머물 수밖에 없게 된다. 거기에서 그는 소련계 2세인 기석복․정률 등의 후원을 받아 ‘북조선 문학예술총동맹’의 부위원장․국가학위수여위원회 문학분과 심사위원을 맡는 한편,「농토」를 비롯하여「아버지의 모시옷」,「첫전투」,「호랑이 할머니」,「38선 어느 지구에서」,「고향길」등의 작품을 발표하여 그들로부터 호평을 받는데 특히 「호랑이 할머니」는 해방 후 북한에서 발표된 ‘최고의 걸작’으로 높이 평가된다.
1953년 휴전 후 김일성계는 전쟁 책임을 남로당에게 전가시켜 그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기 시작하는데 남로당이었던 이태준은 소련파의 비호를 받아 생명은 겨우 부지한다. 이후 남로당 계열인 임화, 김남천 등과 소련 2세파에 대한 거세 작업이 끝날 무렵인 1956년 1월, 한설야는 이태준의 <고향길>에 대해 빨치산 대원을 냉혈동물시했다는 점, <먼지>의 주인공은 해방 전의 그의 대표작 <영월영감>이 분장한 것으로 북한정권을 은근히 반대한 작품이라는 등의 비판을 가했다. 여기에 덧붙여 이태준은 한설야에 의해 과거 구인회 시절에 대해서 "부르죠아 반동 사상의 잔재성을 지닌 작가", "일제의 앞잡이로 혁명 노선을 비판한 인물"로 지탄받는다. 결국 이태준은 노동 개조 처분을 받고 숙청되었다. 이후 1956년 말까지 함흥신문사의 교정원으로, 1957년에는 콘크리트 블럭 공장의 노동자로 전전했으나 곧 행방이 묘연해져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일설에는 1965년 중 북한 심리전 참모부인 당 문화부로 소환돼 대남심리전 원고를 집필하는 비밀 작가로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확인할 수는 없다.
Ⅲ. 나오며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태준은 월북작가이다. 그러나 그의 문학적 공과가 단순히 ‘월북’이라는 사실만으로 극대화되거나 극소수화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월북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의 전 작품이 매도된다거나, 월북 후의 작품이 단순한 선전도구라 폄하되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또한 월북 후의 이태준의 개인적인 활동에 대한 고찰과 함께, 우리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이태준 문학의 특성에 대한 고찰을 통해 남과 북을 아우르는 민족문학사에서의 그의 위치를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한 미문장가로 알려져 있는 이태준 문체의 특성에 대해 보다 명확하게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분명 이태준의 『문장강화』는 당대 우리말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고, 그는 직접 그의 소설에 이를 적용하려 했다. 시문학파의 시어에 대한 자각에 비견되는, 『문장강화』로 대표되는 이태준의 언어에 대한 인식의 수준과 소설의 문장에 대한 자각의 정도가 밝혀질 때에 단순한 미문장가가 아닌 올바른 단편의 완성자 혹은 선명한 인물창조로 대표되는 기교로서의 이태준 문학의 특성이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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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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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문단협회-7월 창작소설총평」,《조선문단》, 192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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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우, 『이태준 소설연구』, 태학사, 1996
이명희, 『상허 이태준 문학세계』, 국학자료원, 1994
상허문학회, 『이태준 문학연구』, 깊은샘, 1993
이기인, 『이태준』, 새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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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만, 「나의 구인회 시대」(『대한일보』, 1969. 9. 30.)
조용만, 「차고 자존심 강한 소설가」, 상허문학회,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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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충환, 「이태준의 전기적 고찰」, 깊은샘, 1993
이병렬, 「이태준의 문학사적 위상-기존의 연구결과를 중심으로-」, 깊은샘,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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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 『가마귀』, 한성도서, 1937. 8, 머리에.
이태준, 『황진이』(동광당서점, 1938)
이태준, 『왕자호동』(남창서관, 1942)
이태준, 『사상의 월야』(조선일보, 1941.3.4~194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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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에 쓴 한국현대소설강독 발표문.
각 글의 각주는 하나하나 옮겨 표시하기 귀찮아서 그냥 마지막 참고문헌으로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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