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이지만 밤바람은 차갑기만 하다. 강물을 그득하게 실은 바람은 민물 냄새가 진동한다. 나는 민물 냄새에 코를 킁킁거려 본다. 민물 냄새는 쉬 가시지 않는다.
달조차 뜨지 않은 밤, 강가는 적막하다. 바람이 펄럭이는 소리도, 강물이 흐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민박집의 불빛도 닿지 않는다. 쥐 죽은 듯한 적막감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일으킨다. 난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배를 찾는다. 재킷 안주머니에서 담배가 손에 잡힌다. 짜부라진 마일드세븐 갑에선 허리가 부러진 담배 한 개비가 나온다.
젠장할 쪽바리 담배!
난 담배를 강둑 위로 던졌지만 바람에 실린 담배는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버린다. 젠장. 다시 담배 한 개비를 꺼내자 담뱃갑은 텅 비어버린다. 담배는 허리가 휘어 있다.
지지리 궁상맞군.
중얼거리며 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바람 때문일까, 라이터는 계속 꺼진다. 몇 번이나 부싯돌을 치지만 번번이 불은 담배에 붙기도 전에 꺼져 버린다. 난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아 재킷으로 바람을 가리고 부싯돌을 다시 튕겨 댄다. 몇 번을 더 튕겨서야 겨우 담배에 불이 붙었다. 라이터를 재킷 주머니에 쑤셔 넣고 빈 답배갑을 구겨 강가로 던졌다.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이자 빨간 불빛이 눈앞에서 타들어 가는 게 보인다. 벌겋게, 언제까지고 벌겋게 타들어 갈 것 같던 불꽃은 연기를 내뿜자 이내 사그라진다. 빨아 댕길 땐 연기조차 나지 않는다. 그러던 것이 뱉어내는 순간 어디 숨어 있던 연기들인지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네 속에 있던 나쁜 마음 때문이야.
언제였지, 연은 내가 내뿜는 담배 연기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안 그래도 나쁜 담밴데 네 마음에 있는 나쁜 마음까지 섞여서 더 나쁜 거야. 좀 끊어.
연은 내가 담배를 피우는 걸 볼 때마다 그렇게 타박했다.
때가 되면 끊을 거야.
그렇게 말은 했지만 늘 담배를 피웠다. 몇 차례 시도는 했지만 시도는 시도였을 뿐,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다음날이면 난 으레 담배를 사서 입에 물고 있었다. 연의 타박은 늘 계속되었고 난 끊겠다고 말하는 대신 담배 연기 가득한 입으로 그녀에게 키스를 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러면 그녀는 눈을 감고 내 입술만 음미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때 친구들은 담배를 피웠었다. 난 그들과 어울려 다니면서도 담배는 피지 않았다. 담배를 물고 있는 그들의 얼굴은 멍청해 보였고 연기 속에 잠긴 주변은 꿈 속 공간만큼이나 현실성이 없어 보였다. 그들은 현실성 없는 공간에서 멍청한 얼굴로 배시시 웃으며 너도 피울래? 하며 내 입가로 담배를 내미는, 원하지 않은 친절까지 베풀었다. 난 고개를 저으며 그런 걸 왜 피워? 라고 묻는다. A는 현실을 떠날 수 있잖아. 라고 답했다. 그랬던 A는 이제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동창회에서 만난 A는 담배를 피우는 내 모습에 적잖이 놀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내, 곧 태어날 둘째 아이가 딸이라는 둥, 아들은 날 닮아 유치원에서 인기가 있다는 둥, 새로 바꾼 차는 어떻다며 너스레를 떨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도전적이고 반항적이며 연신 담배를 피워대던 A는 대학을 가지 않았고 술김에 잠자리를 같이한 여자와 아이를 낳고 살고 있다. 그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현실과 타협을 시작했고 자기 아이를 낳아준 여자를 통해 꽤 큰 음식점을 차렸다. 그는 현실 속의 배 나온 아저씨가 되어 있었고 그런 자신을 꽤나 자랑스러워했다. 너도 요즘 회사에서 잘 나간다며? 어디라고 했더라? 한참을 자신에 대해 떠들던 A가 나에게로 주제를 옮겨왔다. 그냥…… 그렇지 뭐……. A의 질문에 난 담배를 피우는 내가 까닭 없이 부끄러워 졌다. 하지만 담배를 끄진 않았다.
연은 지금쯤 민박집의 이불 속에서 잠들어 있을 것이다. 내가 민박집을 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무슨 바람이 분 거야? 이런 아침에…….
아침, 연의 학원으로 차를 몰고 갔을 때 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봤다. 갑자기 연을 데리고 이곳까지 온 것은 순전히 기분 탓이다. 눈을 뜨자 내 앞에 보이는 현실이 막막하게 느껴졌다. 절대 넘을 수 없는 산이 내 앞에 서 있는 것만 같았고 절대 건널 수 없는 강이 내 앞에서 흐르는 것만 같았다. 밤새 꾼 기억나지 않는 꿈이 계속 심장을 옥죄이는 기분이 들었다. 입었던 티셔츠는 땀에 절어 죽죽한 불쾌감을 줬다. 티를 벗어 세탁통에 던져버리고 소파에 앉아 TV를 틀었다. 아침 뉴스는 칙칙하다. 하루의 시작을 전날 저녁의 사건사고들로 때워버린다. 연쇄 강간 살인범이 어쩌고저쩌고, 자금 횡령이 어쩌고저쩌고, 지구 저편의 폭동이 이렇다 저렇다, 주가가 또 떨어졌네. 그런 칙칙한 이야기들을 당연하다는 듯이 내뱉는다. 머리가 아파왔다. 출근하기가 싫었다. 팀장에게 전화를 걸어 몸이 아파 못 나가겠다고 말했다. 팀장은 순순히 그러라 했다.
어차피 내일이면 주말이잖아. 이번 프로젝트 끝나서 큰일도 없고, 그간 내내 수고했으니까 자네도 힘들겠지. 며칠 푹 쉬어.
팀장은 선심 쓰듯이 말했다. 큰 거래처를 물어다 준 게 역시나 약효가 있다. 월요일에 나가겠다 말하곤 전화를 끊었다.
담배를 찾았지만 담배가 안 보인다. 담배 한 모금이 간절했다. 머릿속에선 간밤에 꾼 꿈이 기억날 듯 말 듯 하며 날 괴롭힌다. 담배 한 개비면 꿈이고 뭐고 다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담뱃갑은 비어있었고 난 머리통을 부여잡고 담배를 사러 지갑을 찾았다. 순간 문득 연이 생각났다. 연의 몸. 담배만큼이나 연의 몸이 절실하게 떠올랐다. 대충 옷을 챙겨 입고 아파트를 나섰다. 상가 슈퍼에서 담배를 사 차에 오르자마자 시동 켜는 것도 잊어버리고 담배에 불부터 붙였다. 연거푸 몇 개비나 폈을까. 그래도 도무지 담배 생각이 지워지지가 않는다. 신호에 서기만 하면 다음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의 학원 앞에 섰을 땐 이미 담배 반 갑이 없었다. 반쯤은 신경질적이 되어선 클랙션을 눌러댔다. 3층 미술학원 창문이 열리고 연의 머리가 밖으로 나왔다 들어간다. 곧 건물 계단으로 그녀가 뛰어 내려온다.
뭐야,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야?
연이 열린 조수석 창문을 통해 말한다.
타, 가자.
어딜?
아무데나.
연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왜 그래, 갑자기.
난 대꾸하는 대신 앞만 바라보았다.
……. 알았어. 기다려봐. 원장 선생님한테 이야기하고 올 테니까.
연은 뛰어서 학원 계단을 올라간다. 난 그녀가 뒤돌아서자마자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웠을 때 그녀가 나왔다.
무슨 바람이 분 거야? 갑자기 나타나선 아무데나 가자니…….
그녀가 조수석에 앉아 문을 닫으며 말했다. 난 거칠게 그녈 향해 몸을 덮쳤다. 재빠르게 그녀의 이마에, 코에, 볼에 키스했다.
그만해! 학원 앞이야.
그녀가 자그마한 자기 주먹으로 내 옆구릴 탁탁 쳤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덮어 버렸다. 그녀는 날 밀어내려 했지만 입 속으로 혀가 휘감기자 손을 멈춰 버렸다. 손대신 혀가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의 입술에서 향내 그득한 립글로스 향이 번져온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느새 내 담배 냄새가 그녀의 입술을 덮어간다. 동시에 그녀의 혀도 내 혀에 매료된 듯 내 혀만 쫓아다니기 바쁘다. 오랜 동물적인 혀 놀림 끝에 난 그녀에게서 떨어져 안전벨트를 매고 엑셀을 밟았다. 차가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간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그녀가 뒤늦게 안전벨트를 매며 다시 묻는다.
보고 싶었어.
난 기계적으로 기어를 바꾸며 대꾸했다. 내 대답에 그녀는 까르르 웃는다.
어제부터 정말 이상해. 갑자기 프러포즈를 하지 않나. 무슨 바람인지 모르겠어.
아, 그러고 보니 어제 연에게 프러포즈한 것 같기도 하다. 그동안 진행하던 계약 건이 마무리되고 간만에 가벼운 마음으로 연을 만나러 갔던 것 같다. 하지만 기억은 좀처럼 나질 않는다. 프러포즈를 했던가? 그런 행복은 남의 이야기처럼 멀게만 느껴지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머릿속은 무엇에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듯 담배와 연으로만 위태하게 가득 차 있다. 도시 인근의 시골에 도착해 바로 민박집을 찾았다. 예전에 한번 와 본 곳이다. 강가에 지어진 민박은 꽤나 현대적인 시설을 갖추고 있어 콘도라 부르는 편이 더 나았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난 연에게 달려들었다. 연은 거친 내 몸짓을 부드럽게 받아 주었다. 연은 그런 여자였다. 밝게 웃으며 내 모든 것을 부드럽게 감싸 안으려는 여자다. 그녀를 안고 있으면 지금의 내가 얼마나 행복한 존재인지 알 수 있다. 그녀의 마음속엔 나만 자리 잡고 있고 그녀의 몸은 나를 위해서만 움직인다. 연은 내 목소리 하나, 하나에서 내 감정을 읽어내고 날 감싸 안고 내 손놀림에 반응한다.
사랑해.
말하며 다시 그녀를 안는다. 좀 전의 희열이 아직 가시지 않은 몸을 더듬는다. 내 입술이 이마에서 시작해 입으로 귀로 목덜미로 가슴으로 점점 내려간다. 입술과 함께 손도 그녀의 몸을 더듬는다. 그녀는 내 몸짓 하나하나에 바르르 떤다. 그녀의 몸은 따뜻하다.
사랑해.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연이 나에게 속삭인다.
애악
강 건너편 산에서 동물 울음소리가 들인다. 울음소리가 어둠을 가른다. 난 희미하게 그려진 산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새의 소리인가? 청승맞은 울음소리다. 다시 한 번 담배를 빨아들인다. 담뱃불은 저 멀리 강 건너의 산까지 비추진 못한다. 그저 담배를 잡고 있는 내 손만 비추다 약해진다. 이름 모를 짐승의, 혹은 새의 울음소리는 어둠을 뚫고 들어와 내 가슴에 박힌다. 울음소리가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담배를 다시 빨아 댕겨 보지만 답답함은 쉬 가시지 않는다.
애악.
다시 울음소리가 들린다. 난 천천히 담배를 다시 빨아들인다. 어둠 속에서 담뱃불은 저 멀리 울음소리까지 닿진 못하지만 내 기억까진 닿는다. 담뱃불이, 짐승의 울음소리가 아이의 울음소리를 닮아 있다. 담뱃불에 어렴풋이 보이는 담뱃재가 아이를 닮았다. 아직 어미의 뱃속에서 탯줄 하나에 의지해 꿈틀대지도 못하고 위태하게 자궁 속을 헤매는 아이를 닮았다. 얼굴조차 엄마를 닮았는지 아빠를 닮았는지는커녕, 손가락조차 나지 않은 자궁 속의 위태로운 덩어리. 생명이라 부르기조차 망설여지는 그것. 네가 운 것이냐.
애악.
강 건너 산에서, 담배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담배를 빨아 댕기기가 망설여진다. 철없던 시절의 기억이 강가에서 기어 올라온다. 산을 넘어 강을 건너 온 기억은 여기저기 상처투성이, 덩어리가 떨어져 나가 단편적이고 젖어 있다. 어딘가 찌들어 있다. 기억은 어느새 담배 연기를 타고 내 코를 통해 머릿속으로 들어섰다.
나…… 가진 것 같아.
기억은 머리를 지배하고 첫마디를 시작한다. 어느새 담뱃대처럼 머릿속도 하얗게 타들어 버린다.
나…… 가진 것 같아…… 아기…….
말해 놓고 그녀는 미안한 듯 고개를 숙여 버린다. 난 그녀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아 눈만 깜빡 거렸다. 그녀의 말은 저 멀리 다른 나라의 말처럼 들린다. 무슨 뜻일까.
뭐라고?
내가 되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들지 않았다. 매미 소리가 그녀의 대답을 대신한다. 멀리서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좀처럼 고개를 들지 않는다.
한번만 더 말해 줄래?
내 목소리는 지금 어떨까. 난 침을 한번 삼키곤 또박또박 다시 말했다. 그녀는 역시 대답하지 않는다. 갑자기 햇볕에 짜증이 난다. 아닌가, 그녀의 태도에 짜증이 나는 건가.
미안해…….
그녀의 한마디에 난 벤치 등받이에 소리 나게 등을 부딪쳤다. 도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걸까.
어제 몸 때문에 병원에 갔는데…… 한동안 생리가 없어서 혹시나 했는데…… 여름이니까. 몸이 안 좋아서 그런가 했는데……. 미안…….
뒤죽박죽이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안 된다. 그녀는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난 멍하니 그녀의 머리카락만 바라 봤다. 길게 흘러내린 머리. 처음 그녀를 만났던 날이 생각난다. 긴 머리가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에 혹해서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팔을 잡아끌었다. 차나 한잔 마셔요. 그녀는 당혹스러워 하면서도 그런 나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카페에서 난 나 혼자 신나서 떠들어댔다. 그녀는 그런 나를 찬찬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가끔 내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시덥잖은 농담에 빙그레 웃을 뿐, 먼저 입을 여는 법이 없었다.
아, 그런데 그쪽 이름은 어떻게 돼요?
카페에서 한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가 다음 강의 시간이……. 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 설 때 그제서야 그녀의 이름을 물었다.
주, 예요.
그녀가 말했다.
주…… 무슨 과예요?
난 그녀의 이름을 입 속에서 한차례 굴려보며 물었다.
경영학부예요.
아, 경영학부였구나. 몇 학번이에요?
그녀는 알 수 없는 미소만 지을 따름이었다.
혹시 9X학번?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9X학번인데!
그렇게 그녀를 알게 되었다. 나는 엄청난 속도로 그녀에게 빠져들기 시작했다. 잠시라도 같이 있지 않으면 불안했고 몇 번이고 사랑한다 말하고 몇 번이고 입 맞추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적극적인 나의 공세에도 그녀는 늘 미소로, 거절한번 하지 않고 다 받아주었다.
쓸데없는 옛날 생각!
난 고개를 저어버린다. 어렸다. 단지 그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실수. 사랑이면 모든 것이 다 되는 줄 알았던 예전의 이야기. 죄책감 같은 것도 느낄 필요 없고, 이렇게 쓸데없이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저 어쩌다, 예전엔 이런 여자도 있었지 하며 이야기하는 그런 정도의 이야기일 뿐!
불이 움푹 파이도록 담배를 빨아들인다. 너무 많은 담배 연기가 폐 속으로 들어온다.
쿨럭 쿨럭!
난 담배 연기를 토해낸다. 독한 담배 연기가 가슴속에 웅크리고 앉아 떠날 줄을 모른다. 몇 번이나 헛기침을 해대지만 담배연기는 기억만큼이나 독하고 끈질기다. 독한 담배연기가 기억하게 만든다. 잊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주와의 기억이 가슴 속에 응어리져 담배와 섞여든다. 어째서 기억나는 것일까. 인생에서 가장 향기로운 순간에 담배 연기 속에서 손을 내젓고 있는 꼴이라니! 주와 헤어지고, 대학을 졸업하고 한번도, 한 번도 그녀를 기억한 적이 없다. 정신없이 달렸고, 인정받았다. 연과 만났다. 그리고 어제 청혼했다. 내 인생은 빛나고 있다.
연, 나의 연. 담배를 피우는 나만 아는 연. 담배를 혐오하던 시절의 나는 모른 채, 담배를 싫어하면서도 내가 피기 때문에, 나라는 이유로 참아내는 연. 사랑스런 연인. 연은 내가 어릴 적 담배를 혐오했다는 사실을 알면 뭐라 말할까. 웃을까. 연의 웃는 모습이 떠오른다. 두 눈이 초승달만큼이나 작아져선 활짝 열린 입 고리까지 내려간다. 그 작은 얼굴 안에 초승달이 세 개나 된다. 초승달들은 서로의 끝이 맞물려서, 선으로 이으면 하트 표시가 된다. 난 그녀의 웃음을 사랑한다. 소리 내어 밝게 웃으면 난 그녀에게 입 맞출 수밖에 없다.
주. 그녀는 그렇게 웃은 적이 있던가. 내 앞에서 한 번도 소리 내어 웃은 적 없었다. 작은 미소로 답할 뿐이었다.
밥 뭐 먹을래? 내일 시간 있어? 영화 볼까? 여행 갈래? 키스해도 돼? 사랑해도 돼?
대답 없이 살짝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때 난 그녀의 미소가 모두 긍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미소만이 내게 의미 있었다. 지금의 나에게 연의 미소가 모든 것이 듯 그때의 나에겐 주의 미소가 모든 것이었다. 미소. 미소가 없는 그녀는 내게 의미 없었다. 웃어줘, 웃어줘. 기억 속의 나는 그렇게 외치고 또 외친다. 제발 미소를 잃지 마.
잠이 오지 않는다.
그녀의 말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나…… 가진 것 같아. 아기…….
아기……. 무슨 의미일까? 난 내 입으로 곱씹어 본다. 집에 조카라도 오는 걸까? 조카…… 그래, 조카일 것이다. 몇 년간 보지 못했던 조카가 입에 오는 것이다. 아니, 아마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조카가 오는 것 일게다. 그래서 그렇게 이야기한 것이겠지. 조카를 돌봐야 하는 건가? 그래서 자주 못 만난다는 걸까? 그래. 이해하자. 사랑하니까. 자주 만나지 못해도 사랑하니까. 그녀가 조카를 잘 돌봐야지.
내 머릿속은 횡설수설한다. 그녀의 말의 의미, 너무도 똑똑하게 이해하고 있다. 아기, 병원, 생리, 그리고 눈물……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 갑자기 내 자신이 못난 인간처럼 느껴진다.
나…… 강의가 있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에게 그렇게 이야기하며 벤치에서 엉거주춤하게 일어섰다.
조금 있다가, 강의 끝나고 다시 이야기하자.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그녀의 볼가에서 눈물이 떨리고 있다. 눈물방울은 어디론가 가지도 않고, 볼가에 머무른 채 떨리기만 하고 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아 눈물 방물만 쳐다봤다. 그녀는 웃지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난 그녀의 눈물이 떨어지길, 그녀가 입을 열길 바랬다. 뭔가, 뭐라도 그녀가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소리 내어 울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무엇이라도 해 줄 수 있을 것만 같은데…….
나 갈께. 좀 있다 얘기하자.
굳게 다물고 있던 그녀의 입술이 움직이던 순간 난 돌아섰다. 그녀가 무엇이라도 이야기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녀가 입을 열려고 하자 무서웠다. 난 발걸음을 황급히 움직였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강의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토록 무섭고도 빠른 발걸음은 처음이었다. 발에 쇠고랑이라도 차고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걸음을 멈추는 순간, 난 구름 위에서 떨어져 버린다. 끝을 알 수 없는 나락으로 팔다리도 허우적거리지 못하고 그대로 떨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떨어져도, 추락해도 좋다. 그녀에게 돌아가자. 발걸음을 돌려 그녀에게 돌아가자. 난 그렇게 외쳤지만 발엔 귀가 없나보다. 발은 말을 듣지 않는다. 아니, 발이 귀를 닫고 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발은 멈추지 않는다. 발은 강의동을 지나쳐 서문으로, 정문으로, 그리고 다시 벤치로 돌아왔다. 그제야 발은 멈춘다. 하지만 벤치에 그녀는 없다. 헤어진 지 두 시간이 지나 도착한 벤치엔 언제 누가 있었냐는 듯 황량하기만 하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다.
전화를 해야지.
난 중얼거렸지만 끝내 전화를 걸지도, 전화 부스에 가지도, 번호를 기억해 내지도 않았다.
어느새 담배가 다 타들어간다. 손가락으로 탁탁 튕겨 불똥을 털어냈다. 불똥은 별똥별 같이 빠른 속도로 땅바닥에 튕겨 떨어진다. 바닥에 떨어진 불똥은 꺼질 생각도 않고 계속 벌겋게 타들어 가고 있다.
담뱃불은 질기다. 꺼질 줄 모르는 담뱃불을 바라보고 있자니 다시 담배 생각이 간절하다. 주머니를 뒤적거려 본다. 담뱃갑에서 흐른 담배 한 개비가 손에 잡힌다.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인다. 바람이 잔잔해져서 담배는 쉽게 불이 붙는다. 내뿜은 담배 연기는 좀 전처럼 바람에 실려 가는 대신 위로 위로 뭉개져 올라간다. 그날의 담배 연기도 이렇게 뭉개져 올라 올라갔지.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담배를 피기 시작한 건…… 머릿속에 선명해진 기억이 내 첫 담배를, 그때의 나를 그려낸다.
분만실. 문 앞엔 분명 그렇게 적혀있었다. 생명이 태어나는 곳. 주는 어쩌면 저 안에서 아이를 낳을지도 모른다. 푸른색 수의를 입은 간호사가 문을 벌컥 열고선 딸이에요, 엄마를 쏙 빼닮았네요. 라고 말할 지도 모른다. 그런 기적이 있는 곳. 아버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내와 자식의 무사를 감사하는 곳. 하나의 생명의 의미가 두 사람, 아니 그 이상의 사람에게 삶의 활력을 주는 곳. 분만실. 주는 그곳에 있다. 하지만 태어나는 것은 내 딸이 아니다.
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병원은 금연이었던가. 아무도 날 제지하는 사람은 없다. 아니, 제지할 사람이 이 병원 복도엔 없다. 그들은 친절하게도 분만실 옆 의자에 쓰레기통까지 마련하고 담배를 유도한다.
담배를 한 모금 빨아 당기자 쓰리고도 알싸한 담배 맛이 입 안 가득 맴돈다. 난 그 맛을 꿀꺽하고 삼켰다. 담배는 내 목구멍을 넘어 몸 속 전체를 쑤시고 다닌다. 오장육부가 꿈틀거리며 발악했지만 난 기침 한번 하지 않았다. 대신 다시 한 번 담배를 빨아 당겨 삼켰다. 내 몸이 발악할 시간을 주지 않고, 쉬지 않고 담배를 빨아 당기고 빨아 당겼다. 내 몸은 어느 순간부터 발악조차 하지 않고 담배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몸은 어느새 담배 연기를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인다.
이래선 안 돼! 고통스러워야 해! 꿈틀거리고 움찔거려! 그래야만 해! 주는! 주는! 주는…….
주의 고통! 내가 아이를 지우자고 이야기했을 때 주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예의 그 긍정의 미소도 보여주지 않았다.
아이…… 지우자.
내 말에 주는 그저 물끄러미 날 바라볼 뿐이었다. 그 눈빛엔 악의도, 적의도, 애원도, 바램도, 희망도, 사랑도 없었다. 의안처럼 보이는 눈빛은 물끄러미 날 바라볼 뿐이었다. 난 그 눈빛이 부담되어 횡설수설 지껄였다.
우린 아직 어리잖아. 우린 아직 학생이고, 난 아직 군대도 안 다녀왔고, 너도…… 계속 공부해야지. 아이는 방해물이 될 뿐이야. 내가 알아봤어. 아이, 지우는 병원도 알아 뒀어. 주야. 너 나 믿지? 이게 우릴 위한 최선의 선택이야. 날 믿어. 나 믿지?
그녀는 대답 없이 날 바라본다. 검은 눈동자가 무게감 없이 흰자위에 떠다니고 있다. 무게감 없는 눈동자는 무게감 없는 아이만큼이나 날 짓누른다. 난 그 형체 없는 두 무게감에 짓눌려 허우적거렸다.
어느새 담배가 다 타들어 갔다. 난 다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담배 연기가 내 머리 주위에서 아른거린다. 구멍이란 구멍은 다 담배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하다. 입에서, 코에서, 귀에서, 숨구멍에서도…… 몸 전체가 담배를 낳고 있다.
순산이에요. 당신 아기예요.
간호사가 나에게 담배 한 갑을 내밀며 이야기한다.
건강한 아이군요.
담배 연기를 아기에게 내뿜는다. 아기는 담배 연기를 피하는 대신 날 쳐다보며 웃는다. 빙그레 미소 짓던 아이가 점점 크게 웃더니 하하하 하며 박장대소한다. 한참 웃어대는 아기의 허리가 꺾인다. 꺾인 허리에서 피 대신 거무죽죽한 담배가 터져 나온다. 난 그 담배를 성스러운 무엇이라도 되는 양 하나하나 손바닥에 주워 담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아이 허리에서 터져 나온 담배는 쌉쌀한 맛이 난다.
어느새 담배가 다 타들었다. 난 휴지통에 담배를 던져버리고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조금씩 목이 아파온다. 가슴이 쿡쿡 쑤시고 못 참을 만큼 배가 아파왔다. 하늘이 떨린다. 성냥개비를 튕기는 손이 계속 헛손질한다. 아파온다. 나는 희죽 웃었다. 아픔은 창자를 도려내는 대신 담배를 생각나게 했다. 희죽거리며 담배를 몇 개비나 폈을까, 분만실 문이 열리며 의사가 걸어 나왔다. 의사 뒤로 간호사가 한 명 나온다. 간호사는 담배 연기에 손을 휘휘 젓는다.
다 잘 끝났어요.
아, 예…….
무엇이 잘 끝나고 무엇이 예, 일까. 간호사는 아이를 안고 나오는 대신 수수께끼를 안고 나왔다.
환자가 옷 갈아입고 나오면 집으로 데려가세요. 조제실에서 약 가져가시고요, 며칠 쉬면 다 나을 거예요. 그 정도는 책임질 수 있죠?
내가 대답하기 전에 간호사는 내 앞에서 멀어졌다.
그 다음엔 어떻게 하면 되죠?
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택시를 타고 그녀의 자취방으로 가는 내내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두 팔로 아랫배를 감싸 쥐곤 비틀비틀, 땅만 바라보며 걸었다. 택시에 타서도 그녀는 그 자세 그대로 웅크리고 있었다. 조제실의 약사는 그녀에게 식후 30분 내에 먹으라며 약 봉지를 심드렁하게 내 놓았다.
아파?
택시에서 내린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여전히 아랫배를 두 팔로 꼭 감싸 쥐고 있었다. 난 대답 대신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있던 오른손에 힘을 줬다.
아파?
그녀가 생기 하나 없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난 뭐라 대답해야 할 지 몰라 머뭇거렸다.
엄마는…… 아파……. 그녀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그녀 뱃속의 아이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녀의 자취방은 3층이었다. 난 늘 그녀에게 옥상에서 어떤 남자가 줄을 타고 창문으로 들어와 널 덮칠지도 모른다며 놀렸다. 내 놀림에도 그녀는 웃으며 그래도 싸고 좋은 집이라고 말했었다.
햇볕도 잘 들어서 늘 따뜻해.
그래서 여름엔 덥고?
아니, 따뜻한 거야. 엄마 뱃속처럼.
그녀는 절대 외박하는 일이 없었다. 따뜻한 집이 기다린다며, 자기 집이 좋다며 밤이면 늘 집에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난 그런 그녀가 야박하다 느꼈지만 나무라진 않았다. 나도 그녀의 그런 따뜻한 방을 좋아했으니까. 그녀와 함께 있는, 그녀를 안을 수 있는 그녀의 방은 어디보다 편안한 곳이었고 따뜻했다. 그런 따뜻한 집. 지금 그녀는 제 힘으로 따뜻한 집으로 오르지도 못했다. 계단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올라가고 있었다. 내 부축조차 마다하고 난간을 부여잡곤 한 걸음을 떼고 숨을 몰아쉬고 한 걸음을 떼고 숨을 몰아쉬었다.
차라리 내 등에 업혀.
난간을 부여잡은 그녀의 손을 감싸며 말했다. 그녀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내 손을 뿌리치곤 다시 난간을 잡았다.
다쳐. 배가 눌리면 다쳐. 아기…….
아기……. 그녀는 온통 아기 생각뿐이었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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