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인터넷 논쟁은 소모적이라 생각해서 끼어들지 않지만...
지금 트랙백하는 블로그의 글은 그 무식이 펠레급이라서 한마디 보탠다.
중고등학교 시절 문법 수업 때 정신만 차리고 있었어도 알 것을 이리도 왜곡하다니...
지금 트랙백하는 블로그의 글은 그 무식이 펠레급이라서 한마디 보탠다.
중고등학교 시절 문법 수업 때 정신만 차리고 있었어도 알 것을 이리도 왜곡하다니...
해당 글의 블로그 링크 : skcom
원문 인용 (붉은 글씨는 내 첨언)
한글은 분명히 숭고한 의도를 가지고 치밀한 과학적인 원리 하에 탄생한 훌륭한 문자 체계일 것이다.
그러나 그게 뭐? 내가 한글을 사용한다고 해서 내 품격이 타 '열등한' 민족들에 비해 올라가나?
막말로, 자기가 세종대왕인 것마냥 외국인에게 '깝치는' 한국인들이 참 많은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게 뭐? 내가 한글을 사용한다고 해서 내 품격이 타 '열등한' 민족들에 비해 올라가나?
막말로, 자기가 세종대왕인 것마냥 외국인에게 '깝치는' 한국인들이 참 많은것이 사실이다.
어떤 문자를 사용하는 지는 그 민족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모든 언어와 표기 문자는 그 지역과 민족의 역사와 상황에 따라 선택된 것이다. 외국인에게 "깝치는" 한국인이 있다면, 그것은 그런 한국인들이 한글에 자부심-혹은 자만심-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선민관에 의한 것이지 한글과는 관련이 없다.
더군다나 그 자랑스러운 한글을 한국인들은 정말로 가슴깊이 사랑하는 것일까?
길거리의 간판, 티셔츠에 새겨진 글자...
나는 한국인이 한글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다.
한국인의 정신적 뼈대에 뿌리깊게 새겨진 열등감은 아직 온전히 치유되지 않는 것이다.
길거리의 간판, 티셔츠에 새겨진 글자...
나는 한국인이 한글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다.
한국인의 정신적 뼈대에 뿌리깊게 새겨진 열등감은 아직 온전히 치유되지 않는 것이다.
이 부분은 상당 부분 글쓴이의 의견에 동감한다. 한글이 적힌 예쁜 티셔츠를 찾기는 영어가 적힌 예쁜 티셔츠를 찾기와 비교했을 때 너무나 힘들다. 분명 우리가 개선해 나가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간판과 티셔츠의 문구들을 한국인이 한글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논거로 들기엔 부족하다. 우리들 중 대다수는 부모님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매일 말이나 행동으로 실천하는 이들은 드물다. 그렇다고 우리가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 할 수 있을까? 다만 늘 마음 한켠에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 휼륭한 한글의 제작에 사용된 언어에 대한 과학적인 원리에 대한 기반 연구는
조선이 아니라 중국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한국은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먼치킨 학자이자 권력자 '단 한명' 덕분에
외국에서 수입한 기초 이론을 가지고 얼렁뚱땅 새로운 문자체계를 가지게 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기초과학은 등한시하고, 돈이 되지 않는 인문학적 학문 연구는 천대하는 현재의 풍조와 웬지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때나 지금이나, 한반도인들은 외국의 기초학문들을 수입해다가 그 위에서 깔짝댈 뿐이다.
조선이 아니라 중국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한국은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먼치킨 학자이자 권력자 '단 한명' 덕분에
외국에서 수입한 기초 이론을 가지고 얼렁뚱땅 새로운 문자체계를 가지게 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기초과학은 등한시하고, 돈이 되지 않는 인문학적 학문 연구는 천대하는 현재의 풍조와 웬지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때나 지금이나, 한반도인들은 외국의 기초학문들을 수입해다가 그 위에서 깔짝댈 뿐이다.
내가 이 글에 대해 글을 덧붙이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된 부분다. 인터넷 검색 찬스만 사용해도 이런 무지를 드러내진 않았을 것을... 여말선초에 이미 중국에선 음운학에 대한 연구가 무척이나 정교하게 발전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글을 만드는 데에 있어서 중국의 음성학과 음운학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진 않았다. 그 이유는, 중국의 음운 구조는 이차원적인데 반해 우리 음운 구조는 3차원적이기 때문이다. 바로 국어에서 그 유명한 초성, 중성, 종성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종대왕은 집현전을 만들어 국어에 맞는 독자적인 음운학을 연구해야 했고, 그 연구결과 우리는 초성과 종성의 음운학적 성질은 같기 때문에 자음만 사용하면 된다는 것을 알았고, 중성에는 모음을 사용해 문자 표기의 경제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인류의 철학과 사회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국가들 간의 활발한 교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학문적 교류와 문화적 교류가 없었다면? 모르긴 몰라도 지금 전 세계 인류의 생활은 원시 수준에서 그다지 많이 발전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다른 학문을 수용한 것은 전혀 부끄러운 사실이 아니다. 그 수용한 학문을 무비판적으로 경전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우리는 이미 그런 무비판적 수준을 벗어난 지 오래다. 성리학의 도입 이후에는 이황과 이이를 통해 중국의 성리학 경지를 뛰어 넘은 경험이 있고, 그 외 다른 분야에서도 그런 경향성은 두드러진다. (단적인 예로, 국어교육계에서도 외국에서 공부하고 왔다는 이가 새로운 이론을 학계에 소개하면 다른 학자들은 이를 철저히 분석한 다음 수용과 배척의 여부를 결정한다. 수용한다해도, 곧 이를 보완ㆍ발전시킨다.)
글쓴이는 지금 단지 비판을 위한 비판을 썼을 뿐이다. 큰 틀과 그림을 보진 않고, 단지 자신의 생각 안에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정보와 근거들 만을 산발적으로 수집해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해 나갈 뿐이다. 글쓴이의 학창시절 국어 선생님이 그렇게 글 쓰라고 말하진 않았을 텐데...
나는 한글이 전혀 자랑스럽지가 않다.
이것은 짐승에게 보석을 준 것이나 다름이 없는 일이다.
언제나 한반도의 '열등 종자들'은 제대로 된 기반이나 전체적인 수준높은 역량을 지니지 못한채로
정신력, 김치, 그리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 먼치킨 선지자에게나 의존하는 것이다.
이것은 짐승에게 보석을 준 것이나 다름이 없는 일이다.
언제나 한반도의 '열등 종자들'은 제대로 된 기반이나 전체적인 수준높은 역량을 지니지 못한채로
정신력, 김치, 그리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 먼치킨 선지자에게나 의존하는 것이다.
"나는 한글이 전혀 자랑스럽지가 않다." 피터즈의 선험적 정당화를 패러디해서 말하자면, 글쓴이는 한글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글을 자랑스럽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글쓴이는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철저히 자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장문의 글과 자신의 한국인에 대한 -비록 편협한 시각으로 점철되었지만-깊은 생각을 글로 쓸 수 있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어느 나라나 근대화와 시민 의식의 성장 전에는 먼치킨급 선지자에 의존했다. 심지어 프랑스의 시민혁명 사상이 전 유럽으로 뻗어 나가는 데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나폴레옹이라는 훌륭한 먼치킨 독재자가 있었기 때문이니까.
'자부심'을 갖고 싶다면
자기를 담그고 있는 목욕탕 물이 휼륭함을 자랑하지 말고
자기 자신이 대단함을 스스로 느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놓여진 진정한 현실은 그저 초라할 뿐이다.
자기를 담그고 있는 목욕탕 물이 휼륭함을 자랑하지 말고
자기 자신이 대단함을 스스로 느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놓여진 진정한 현실은 그저 초라할 뿐이다.
맞는 말이다. 이 부분만을 놓고 보자면, 이 글에서 가장 훌륭하고, 누구나 동의할 수 밖에 없는 말이다. 하지만 이 글을 사용하기 위해 지금까지 전개한 글의 논리는 조잡한 수준이다. 그리고 한가지 더. 위 글에 나오는 목욕탕이 "자기"의 것이라면? 자부심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이 목욕탕 물을 민족으로 바꿔서 생각해 보자.(민족주의가 싫다면 한글로 바꿔도 좋다.) 한글과, 그리고 우리 민족이 걸어온 길은 절대 부끄럽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좌충우돌도 예전의 가장 찬란했던 시기에도 있었던 일이다. 어느 민족, 어느 시기에서나 말이다. 그것이 인간이니까. 그리고 개인과 민족, 국가와 인류는 그렇게 발전해 왔다. 자, 아직도 부끄러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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