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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교육 읽기

향가의 세계

by 영혼의환 2010. 5. 8.

Ⅰ. 총론

 

1. 향찰, 이두, 구결

 

1) 향찰

 

향찰이라는 명칭은 「균여전」 “역가현덕분”의 최귀행 서문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는 재자명공들은 한시를 이해하여 읊조리는데 저 중국의 박학하고 덕망이 있는 선비들은 우리나라의 노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한문은 인드라의 구슬망이 얼기설기 이어진 것 같아서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읽을 수 있으나, 향찰은 범서가 죽 펼쳐진 것 같아서 중국에서 알기가 어렵다.

 

라고 하여 향가는 향찰로 표기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향찰은 중국 외래문화를 도입하는 가정에서 지명ㆍ인명ㆍ관명 등을 한자의 음을 빌어 표기하려는 극히 초보적인 문자 이용으로 자국문자를 가지지 못하는 경우 외래문자의 도입과정에서 일어나는 자연발생적인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도 초기에는 단순한 인명ㆍ지명ㆍ관명 등에만 쓰다가 점점 언어 전체에 걸친 표기로 발전하였다고 본다. 우리말을 전면적으로 표기한 차자표기 자료는 향가밖에 알려진 것이 없으므로 향가의 표기법이 향찰의 표기법으로 이해되고 있다.

 

2) 이두

 

이두는 향찰의 뒤를 이은 것으로 그 명칭은 「삼국유사」와 거의 동시인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에 “큰선비 설총은 (吏書: 이서)이두를 지어내니 속언과 방언까지 글자로 적게 되었다.” 라고 하여 처음으로 이서(吏書)란 명칭이 보이며 조선 태조 4년에 지은 「대명률직해」발문과 최만리의 훈민정음 창제 반대 상소문에도 이두에 관한 언급이 있다. 최만리의 반대 상소문은 이두의 성격을 가장 간명하게 밝힌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두는 한자를 차용하여 쓴 문자임을 전제로 하였고, 특수어와 허사만을 차용 표기하는 표기체계임을 지칭한 것이다. 이두는 서리ㆍ복예들을 중심으로 관민 사이에 쓰이는 공용문자 또는 공용문장을 의미하는 것이며, 일반 문자생활의 권외에서 사용된 요도제한의 특수 표기체계임을 알 수 있다.

향찰과 이두에 대한 학설은 향찰과 이두를 동일 개념으로 보는 견해와 향찰과 이두를 수별하려는 견해가 있는데, 향찰이나 이두가 국어를 표기하려는 동일한 의식에서 발달하였지만 형태적으로나, 사용 범위로나, 사용 계층 등을 살펴볼 때 구별되어야 한다고 본다.

 

3) 구결

 

구결은 한문의 경전을 읽음에 있어 그 문장의 뜻을 돕기 위한 것으로 토(吐)라고도 한다.구결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10년 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옛날 태종께서 권근에게 명하여 오경에 토를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각주에는 “무릇 독서할 때에 우리망의 절구로써 읽는 것을 시속에서 토라고 한다.”라 하여 한문을 읽을 때 국어를 구절에 달아 읽는 것을 토라 한다 하였다. 이처럼 구결은 일찍이 한학자들에 의하여 창안되어 이용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구결은 한문 원전에 토를 단다는 일정한 한계가 있으므로 향찰이나 이두와는 쉽게 구별된다. 이두문은 한자어와 차자 표기의 고유어가 혼용된 특이한 형태의 문장으로서 차자 표기를 제외시키면 문맥이 이어지지 않지만, 구결문은 한문에 토를 표기하였기 때문에 토를 제외시키더라도 원문인 한문 자체에는 아무런 형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두는 공용문서나 증서 및 소장 등에 사용된 일반서민층의 소유물로 그 표기의 범위에 있어서는 명사ㆍ동사ㆍ부사 등의 특수어에까지 사용되었으며 한문과 국어의 혼용이었음에 반하여 구결은 오직 성균관을 비롯하여 향교ㆍ서원 등에서 한학 보급을 위하여 사용된 상층 지식계급의 소유물로 그 표기의 벙위가 극히 한정되었으며 실질적으로 구결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한문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없다.

 

2. 향가와 사뇌가

 

1) 향가

 

고려 현종 13년(1022)에 세운 개성군 영남면 “현화사비음기”에 보면 향가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성상계서 이에 향풍체가를 본따서 친히 노래를 지으시고 마침내는 신하들에게 경찬시뇌가를 지어 바치도록 선허하였다.

 

라는 말이 있는데, ‘향풍체가’는 향가를, ‘시뇌가’는 사뇌가를 의미한다고 본다. 따라서 11세기까지 향가가 성하게 불려 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어찌해서 현종의 노래는 향풍체가라 하고 군신들의 노래는 시뇌가라 했는지 당시의 작품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 음기만으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향풍체가는 향가를 말하고 시뇌가는 사뇌가를 의미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 후 향풍체가가 아닌 향가란 말이 문헌상에 최초로 보이는 것은 고려 문종 29년(1075)에 이루어진 「균여전」에서 이다.

 

한시는 중국 글자로 엮어서 다섯 자, 일곱 자로 다듬고, 향가는 우리말로 배열해서 삼구육명으로 다듬는다. 그 소리를 가지고 논한다면 참성과 상성이 동서로 나뉘어 쉽게 식별할 수 있는 것처럼 현격한 차이가 나지만 문리를 가지고 말한다면 상과 방패가 어느 것이 강하고 약한지 단정하기 어려운 것처럼 서로 맞서는 정도다 … <중략> … 1수의 향가는 사청구려 하다. 그 지어진 것을 사뇌라고 부르나니 가히 정관 때의 시를 능욕할 만 하고 정치함은 賦(부) 중 가장 뛰어난 것과 같아서 혜제 명제 때의 부에 비길 만 하다.

 

즉 ‘11수의 향가는 글이 맑고 글귀가 아름답다. 그 지어진 것을 사뇌라고 부른다.’라고 하여 향가라는 말이 최초로 보인다.

「삼국사기」32권 악(樂)에서는 우리나라 사람을 향인(鄕人)이라고 하고 우리나라의 악기를 향비바, 향삼죽이라고 하였으며, 「삼국유사」에서는 모두 우리말을 향언, 향어, 향운, 향칭으로 쓰고 있다. 이처럼 향(鄕)이란 말은 매우 폭넓게 쓰였던 것으로 오늘날 시골이라는 뜰 보다는 우리나라라는 의미가 더욱 강했던 것 같다. 따라서 향가라는 것은 중국의 시가와 상대적인 개념으로 쓴 것이며 4ㆍ8ㆍ10구체 향가 모두를 포괄하는 시가의 명칭이라고 본다.

 

2) 사뇌가

 

옛 문헌에 사뇌 또는 사뇌가란 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 용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그 서문에 이르기를 무릇 사뇌라는 것은 세상사람들이 즐기는 도구다.

대사는 학문 외에 사뇌(의미가 가사에 정교하게 나타나는 고로 일컬어 뇌라 한다)에 몹시 익숙했다.

11수의 향가는 글이 맑고 문구가 곱다. 그와 같이 지어진 것을 사뇌라 부른다.

처음으로 두솔가를 지었는데 차사가 있는 사뇌격이었다.

대사가 기파랑을 찬미하는 사뇌가를 지어 그 뜻이 심히 고상하다 하는데 그것이 사실인가 하니 대답하여 그렇다 하였다.

왕은 진실로 빈궁과 영달이란 것이 변화무쌍함을 알고 신공사뇌가를 지었다. 노래는 없어져 전하지 않는다.

11수의 향가는 글이 맑고 문구가 곱다. 그와 같이 지어진 까닭에 사뇌라 부르나니 가히 정관 때의 시를 능욕할 만하고, 정치함은 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과 같아서 혜제 명제 때의 부에 비교할 만하다.

 

문헌에 쓰인 사뇌, 또는 사뇌가란 말은 분명히 향가와 관련되었지만 사뇌란 말이 명확히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그런데「균여전」에서는 내용 또는 표현과 관련지어 향가 중에서도 우수한 것을 지칭하는 말로 쓰여진 것 같으며, 「삼국유사」의 경우에는 “유차사사뇌격”, 즉 차사가 있어 사뇌격이라 한다는 것으로 보아 낙구(落句) 형태를 갖춘 형식위주의 작품에 붙여진 명칭인 듯하다.

그러므로 사뇌가는 희락과 관련하여 제작ㆍ가창된 노래로서 가사가 아름답고 정치하며 담겨진 뜻이 고상하여 뛰어나므로 향가 중에서 우수한 것을 지칭한 것이 아닌가 한다. 따라서 같은 개념을 향가라고도 하고 사뇌가라고도 한 것이 아니라 사뇌가는 향가의 하위개념으로 생각된다.

 

3. 향가의 기능

 

고대문학은 고대사회의 향상이나 삶의 형식, 믿음이나 종교 등의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어지며, 그 목적도 원시적 삶의 실제적 해결 수단으로 만들고 불려지게 되었다고 본다. 신라 제3대 유리왕 5년에 불렀다고 하는 <도솔가>의 창작 배경을 보면 “겨울에 왕이 나라를 순행하다가 동사 직전에 있던 노인을 발견하고 옷과 음식을 주어 도왔는데 그 해에 풍년이 들고 태평성대가 되어 <도솔가>를 지어 불렀다.”고 하였다. 이로보아 향가는 백성들의 안위나 삶의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하늘의 도움과 임금의 어진 정치에 감사하기 위한 교감 속에서 생성되었고, 그 후 「삼국유사」에 기록되었다고 본다.

또한 「삼국유사」의 창작 동기와 신라 시대 종교의 양상을 살펴보았을 때, 토착민의 원시 종교가 불교와 혼합된 것이 신라의 밀교(密敎)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신라인들의 사상은 현존 향가들에도 고스란히 녹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이 이미 기이ㆍ탑상ㆍ의해ㆍ감통ㆍ피은으로 구분해 향가를 수록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수록된 향가의 배경설화 내용으로 보아 향가는 역시 불교 신앙에서 우러난 영험의 세계나 종교적인 시상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향가의 관련 기록들을 검토해 보면 다음과 같은 점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향가는 신라 일대에 널리 불려진 노래란 점, 그래서 왕이 이를 수집케 하였다.

둘째, 신라 사람들이 향가를 숭상하는 사람이 많았다.

셋째, 향가란 시경의 송가(頌歌)와 같은 류이다.

넷째, 향가는 하늘과 깡, 귀신들까지도 감동케 하는 힘을 가졌다.

다섯때, 향가는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면서 불려진 노래다.

「균여전」에서도 ‘무릇 사뇌라는 것은 세상사람들이 즐기는 도구다.’라고 하여 단순한 오락적인 기능보다는 불법을 널리 펴기 위하여 대중들과 친밀하다는 것을 지적한 것으로 불교의 종지는 세인들의 생활 속에 파고들어 그 속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 본다. 그리고 향가를 통해 세인들이 바라는 바 염원이 성취된다고 믿었다.

이러한 것을 토대로 「균여전」의 기록을 검토해 볼 때 향가의 속성을 다음과 같이 정이할 수 있다.

첫째, 향가란 세인들의 희희덕거리고 즐거워하는 도구다. 불교의 교리를 대중들에게 전파하기 위해서 향가라는 도구를 사용했다.

둘째, 향가는 대중들이 즐겨 외우는 노래였다. 그리고 종교적인 효험을 얻었다.

 

4. 향가의 형식

 

향가의 형식에 대한 언급은 「균여전」에서 최행귀가 한시와 향가의 형식을 대비시켜 “한시는 중국 글자로 엮어서 다섯 자, 일곱 자로 다듬고, 향가는 우리말로 배열해서 삼구육명(三句六名)으로 다듬는다.”라고 한 것이 유일무이한 자료다.

삼구육명(三句六名)에 대한 지금까지의 여러 학자들의 논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탁은 삼구는 향가의 구조가 세 개의 구조단위로 되어 있음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각각의 구조단위를 1구로 보았고 1구는 육명이라 하고 이 명은 허사를 포함한다고 하였다. 즉, 각 장을 구, 음절을 명으로 보았다.

김사엽은 삼구는 의미상 향가의 세분절, 육명은 6자를 지적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김수업은 삼구육명을 6음절 3음보를 이루는 것으로 보아 3음보 6자설을 주장하였다. 즉, 각각의 삼구는 3음보이며 6명은 6음절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논의대로라면 한 음보는 두 음절씩 나누어진다. 이는 모든 향가 작품을 ‘일음보=이음절’로 고정시켜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점이 제기된다.

최철은 삼구육명이란 곧 차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즉 향가 형식을 논함에 있어 차사를 삼구육명이라 표현하여 구와 명을 달리한 것은 최행귀가 당시(唐詩)의 형식을 설명할 때 언(言)과 자(字)를 달리 표기한 것과 같은 표현기법으로 보았다. 차사에 해당하는 삼구는 ‘후구, 낙구, 격구’로 보았고, 육명에 해당하는 차사로는 ‘아야, 명음, 타심, 성상인, 후언, 탄왈, 차사, 구명’으로 보았다. 이는 우리 가요의 큰 특질 중의 하나를 낙구에 사용되는 감탄사로 파악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Ⅱ. 각론

 

현전하는 향가는 모두 14수로 「삼국유사」에 그 배경 설화와 함께 전해지고 있다.

향가의 특성은 고대 집단 가무의 양식이 향찰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참여적인 문학성을 갖는 데 있다. 승려를 비롯하여 평민니아 귀족 모두가 불교 신앙과 토속적인 샤머니즘을 바탕으로 향가를 창작하였고, 개인의 서정적인 연모와 나라에 대한 감상 등이 중심을 이루어 불교적인 색채가 짙으면서도 소박하고 단순한 서정 민요를 구성하였다.

형 식

작 품

작 가

연 대

내 용

4구체

서동요

서동

진평왕

서동이 선화 공주를 얻기 위하여 신라 서라벌의 아이들에게 부르게 한 참요(민요).

풍요

백성들

선덕여왕

양지가 영묘사의 장육존상을 만들 때 부역을 왔던 백성들에게 부르게 한 노래. 노동요

헌화가

견우노인

성덕왕

소를 몰고 가던 노인이 수로 부인에게 꽃을 꺾어 바치며 부른 노래

도솔가

월명사

경덕왕

해가 둘이 나타나자 하나의 해를 없애기 위해 부른 노래. 산화공덕의 노래

8구체

모죽지랑가

득오

효소왕

화랑 죽지랑의 고매한 임품을 따르던 낭도가 추모하여 부른 노래. 추모가

처용가

처용

헌강왕

처용이 자기 아내를 범한 역신에게 이 노래를 지어 불렀더니 역신이 물러갔다는 노래. 주술가

10구체

혜성가

융천사

진평왕

심대성을 침범한 혜성을 물리치기 위해 부른 노래. 주술가

원왕생가

광덕

문무왕

극락 왕생하기를 바라는 광덕의 불교적인 신앙심을 읊은 노래

원가

신충

효성왕 1년

효성왕이 나중에 다시 부르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자, 신충이 지어 잣나무에 붙였다는 노래. 주술가

제망매가

월명사

경덕왕

일찍 죽은 누이의 명복을 빌며 부른 노래. 추도가

안민가

충담사

경덕왕의 요청에 의해 임금과 신하와 백성의 도리를 노래한 치국안민의 노래

찬기파랑가

충담사가 화랑인 기파랑의 높은 님품을 추모하여 부른 노래.

도천수대비가

희명

희명이 눈먼 자식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부른 불교적 신앙의 노래

우적가

영재

원성왕

화랑 영재가 도덕의 무리를 만나, 이 노래를 지어 부르자, 도둑들이 감동하여 승려가 되었다는 설도의 노래

 

1. 서동요

 

善化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卯乙抱遺去如

선화공주니믄

 그지 얼어 두고,

맛둥바

바 몰 안고 가다.

선화 공주님은

남 몰래 시집가 놓고

서동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이 작품은 백제 무왕이 지은 현존하는 최고의 향가로, 4구체 형식을 갖춘 향가 중 유일한 동요이다. 그리고 민요의 하위 갈래인 동요이면서 참요이다. 이런 점에서 전래 민요체가 후대에 와서 문자로 정착된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삼국유사』에 전하는 백제 무왕의 설화는 전래 민요로서의 <서동요>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결부된 후대의 이야기일 것이다.

이 노래는 소박하고 장난스러운 동심이 서려있는 동요적인 단순성은 있으나 깊은 문학적 배경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다만 배경 설화의 내용처럼 서동이라는 한 영웅이 시련을 극복하고 왕이 되기까지 벌어지는 하나의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사랑을 위해 목숨도 희생하는 고대인(古代人)의 강한 정열을 엿볼 수 있다. 신라 시대 남녀의 연애는 오늘날에 비해 오히려 자유롭고 공개적이었다. 그러나 귀족의 경우 연애는 자유로웠지만 결혼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따랐을 것이다. 이러한 어려운 제약을 꿇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룬다는 것은 영웅에게는 필연적으로 포함되어야하는 이야기이다. 영웅의 일생은 결혼이라는 것에 의해서 성공의 실마리가 풀리며, 이 <서동요>는 이러한 성공의 열쇠 구실을 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그 흥미를 더해준다.

 

2. 혜성가

 

舊理東尸汀叱乾達婆矣

遊烏隱城叱兮良望良古

倭理叱軍置來叱多

烽燒邪隱邊也수耶

三花矣岳音見賜烏尸聞古

月置八切爾數於將來尸波衣

道尸掃尸星利望良古

彗星也白反也人是有姪多

後句 達阿羅浮去伊叱等邪

此也友物北所音叱慧叱只有叱故

녜샛물가 건달바에

놀은잣흘란 바라고

옛군도 왔다.

봉화 살안가 이슈라

삼화에 올암 부샤올 듣고

달두 바즈리 혀녈바에

길 쓸 별 바라고

혜성이여 살반여 사람이 있다.

아으 달 아래 떠갔어라

이어우 므슴 혯기 있을고.

옛날, 동해 물가에 건달바가

어리던 성(城)을 바라보고

왜군이 왔다고

봉화를 올린 일이 있었다.

세 화랑이 산 구경 간다는 소식을 듣고

달도 부지런히 밝히려는 가운데

길을 쓸고 있는 별들을 바라보고

혜성이여, 하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아아, 달 아래로 떠나갔더라

어이유, 무슨 혜성이 있을까?

이 노래는 신라 진평왕 때 스님 융천사가 지은 10구체 향가로, 향가 중에서 최초로 10구체 형식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다만 다른 10구체의 향가는 모두 첫 구가 4ㆍ5ㆍ6음 정도인데, 이것만은 첫 구를 ‘건달바’에서 끊으면 9음이 되어 예외가 생긴다.

진평왕 때에는 10구체 향가가 널리 유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익숙해 즉흥적으로 그런 형식의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그것으로도 10구체 향가 형식이 삼국 말기 이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완전한 향찰이 삼국 말기에 이루어졌다고 본다면, 그보다 몇 백년 이전의 노래는 구전될 수 없었기 때문에, 문헌에 기록이 없어 『삼국유사』에 옮겨 실을 수 없었던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 노래는 향가 중 가장 주술적인 작품이며 축사적인 내용이 담긴 시이다. 그러나 예술적 기교가 담긴 직유법을 사용하였으며 향가를 신성시하고 주술시하는 전통적 유풍이 특징이다. 고가(古歌)로서는 특이하게 비유와 상징, 그리고 유머와 위트가 중첩되어 있어 하나의 이채로운 맛을 느끼게 하며, 작품의 유래와 별개로 하나의 순수한 서정시로 본다고 하더라도 뛰어난 작품이다.

 

3. 풍요

 

來如來如來如

來如哀反多羅

哀反多矣走良

功德修叱如良來如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셔럽다라.

셔럽다 의내여.

공덕 닷가라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럽더라.

서럽다 우리네여.

공덕 닦으러 오다.

신라 선덕여왕 때 지은 작자 미상의 4구체 향가이다. 선덕여왕 때의 명승이며 대예술가인 ‘양지’가 영묘사의 장륙삼존상을 만들 때, 사녀들이 진흙을 운반하면서 부른 노래로 일종의 불교적인 민요이다. 이 노래는 일명 ‘양지사석가’또는 ‘바람결 노래’라고도 불리운다. 본문에 ‘공덕’이라는 말에서 암시되고 있듯이 종교적인 정조를 수반하고 있는 일종의 노동요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또한, 한줌의 흙이라도 이토시주(泥土施主)사 된다는 불교적 민요로 보기도 하는데, 이는 양지가 흙으로 부처님을 만들 때 진흙을 나르며 동료들에게 ‘어서 어서들 오너라, 무상한 우리 인간들이여, 공덕이나 닦으러 오너라’는 내용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풍’이란 것은 서민들을 통해서 자연 발생적으로 솟아나오는 풍자와 해학의 성격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 꾸밈이나 가식없이 있는 그대로의 민심이 잘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노래가 노동의 가치를 귀하게 여겼음을 보여주는 것에도 불구하고, 노래의 내용은 그지없이 처량하고 서글프다. 이 세상의 것은 모두 부질없으니, 이 세상에서 할 일은 동덕을 닦는 일뿐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인생의 무상함을 부처님께 귀의해서 초극하자는 전도적인 내용이 담겨져 있다. ‘서럽다’라는 말은 무상함의 의미를 나타낸다. 당시 서민들이 살아가기에는 그만큼 험난하고 어려운 세상살이였으며, 오로지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으로 여기는 민심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4. 원왕생가

 

月下伊低赤

西方念丁去賜里遣

無量壽佛前乃

惱叱古音多可支白遣賜立

誓音深史隱尊衣希仰支

兩手集刀花乎白良

願往生願往生

慕人有如白遣賜立

阿耶此身遣也置遣

四十八大願成遣賜去

하 이뎨

서방 장 가샤리고

무량수불전에

닏곰다가 고샤셔.

다딤 기프샨 존어 울워러

두 손 모도호

원왕생 원왕생

그릴 사 잇다 고샤셔

아으 이몸 기텨 두고

사십팔대원 일고샬까

달님이시여, 이제

서방정토까지 가시려는가

무량수불 앞에

알리어 여쭈옵소서.

맹세 깊으신 부처님께 우러러

두 손 모아서

왕생을 원합니다, 왕생을 바랍니다 하며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고 사뢰옵소서.

아아, 이 몸을 버려두고

마흔 여덟 가지 큰 소원을 이루실까

이 노래는 달에게 의탁해서 극락 세계에 가기를 소원한 신앙의 노래이며, 불교 내세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 노래에서 달의 의미는 매우 중요한데, 달은 광덕이 발 딛고 서 있는 차안과 아미타불이 계신 피안의 서방정토를 오고 갈 수 있는 불법(佛法)의 사자(使者)인 것이다."원왕생(願往生)"이란, 왕생극락을 원한다는 말로서, 곧 죽어서 극락에 태어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극락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천당과 같으며, 불교에선 아미타불이 계시는 서방정토를 말한다. 이 노래는 소위 아미타불의 48대원을 중심으로 노래한 것인데, 그것은 아미타불이 부처가 되기 전에 만일 자기가 부처가 된다면 48가지 일을 완전히 성취하겠다고 한데서 유래된 말이다.

불교적이면서도 신앙에의 갈등이나 초조와 갈망이 자신의 공덕을 시험해 보고 싶은 자긍심과 함께 섬세하게 나타난 작품이다. 노래에 간직된 가사의 뜻은 소박하고 솔직하다. ‘달’은 다른 향가에도 수없이 나오지만 서방과 관념적인 동조를 하고 있는 것은 이 노래뿐이다. ‘달이 천개나 되는 강을 비춘다’거나 ‘일체의 목숨을 가진 것에는 다 부처님의 본성이 있다’고 하는 대승적 견지에 의하지 않더라도, 이 사바에 비쳐진 달을 구상화된 서방의 사자로 느꼈을 것이다. 서방은 다다르기 어려운 아주 머나먼 곳으로 상상할 수 있는 곳이지,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그러므로 달은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염불을 외워서 서방정토에 가 태어나겠다는 생각은 그 자체가 학식에 물들어 있는 비판적인 정토관보다는 더욱 서민적이고 또 진실한 종교적 발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부부관계를 종교적인 신앙심으로 맺어진 신성한 계약으로 생각하고, 자기 아내와 더불어 육욕의 세계를 초월한 참된 공적을 닦아야만 정토에 갈 수 있다는 것은 범부(凡夫)가 쉽게 이룰 수 있는 삶은 아니다.

 

5. 모죽지랑가

 

去隱春皆林米

毛冬居叱哭屋尸以憂音

阿冬音乃叱好支賜烏隱

貌史年數就音墮支行齊

目煙廻於尸七史伊衣

逢烏支惡知作乎下是

郞也慕理尸心未 行乎尸道尸

蓬次叱巷中宿尸夜音有叱下是

간 봄 그리매

모 것 우리 시름.

아 나토샤온

즈 샬쯈 디니져.

눈 돌칠 이예

맛보디 지리.

낭이여 그릴  녀올 길

다봊 굴허헤 잘 밤 이시리.

간 봄을 그리워함에,

모든 것이 울면서 시름하는구나.

아름다움을 나타내신

얼굴에 주름살이 지려하는구나

눈깜짝할 사이에

만나보게 되리.

낭이여, 그리워하는 마음에 가는 길

다복쑥 우거진 구렁에서 잠을 잘 수 있는 밤도 있으리.

득오가 죽지랑이란 화랑을 추모 또는 사모한 노래이다. 죽지랑은 이름난 화랑이며 장군으로, 진덕왕 때 김유신과 함께 국사를 논의하던 술종공의 아들이며 진골 출신이다. 아버지가 미륵상을 세운 뒤 그 공덕으로 태어났다고 하는데, 삼국 통일에 큰 공을 세우고 벼슬이 이찬에까지 올랐으며, 미륵의 화신으로 여겨질 정도로 높이 숭앙된 인물이다. 작자인 득오는 원래 죽지랑의 낭도였다가 익선에게 매여 고난을 겪던 중 죽지랑이 이끌고 온 무리들에 의해 구해졌다는 이야기가 이 노래의 배경설화에 나타나 있다.

죽지랑에 대한 사모의 정이 시 전체에서 간절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노래는 죽지랑과 고락을 같이하던 지난 시절을 그리워하면서 시작된다. 특히 '이미 가 버린 돌이킬 수 없는 봄'이란 은유적인 기법을 사용, 청춘 즉 죽지랑과 함께 지낸 시절에 대한 회상과 아쉬움을 강하게 묘사하고 있다. 죽지랑의 죽음에 대한 애도 또한 이 세상 모든 것이 슬퍼한다고 표현함으로써 죽지랑의 인품을 한 차원 높이고 있으며, 고매한 인품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게 한다.

특히, 마지막 7,8행은 10구체 향가의 낙구인 9,10구와 같은 감탄사를 가진 유사성을 보여 주는 동시에, 절묘한 은유적 표현으로 전개되어 있다. '그리워할 마음의 가는 길'이라는 감정의 구상화와 '다북쑥 마을'이 지니는 황촌(荒村)은 곧 작자 득오가 낭을 만날 수 없다는 인식에서 오는 정신적 초토(焦土)나 폐허의 은유적 표현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작자의 정서적 처절성이 가열하면 해질수록 죽지랑이라는 화랑의 인품과 덕의 높음을 실감 있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죽지랑을 사모하는 간절한 이러한 마음은 당시 의리에 충실하고 의리를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했던 화랑의 정신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존경하는 재상, 나아가 자신이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몸소 찾아와 자신을 구해준 사람의 죽음 앞에서 그를 추모하는 마음은 남다를 것이다.

 

6. 헌화가

 

紫布岩乎 过希

執音乎手母牛放敎遣

吾 朕不喩慙朕伊賜等

花 朕折叱可獻乎理音如

딛배 바회 

자온손 암쇼 노시고,

나 안디 븟리샤

곶 것가 받오리이다.

자줏빛 바위 가에

잡고 가는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노인의 몸인데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위해 목숨을 걸고, 벼랑 긑의 꽃을 꺾어 바치는 노인의 순수성을 느낄 수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노인의 낭만적인 행동 뿐만 아니라 수로 부인의 아름다움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부인이 아름다웠기 때문에 생명을 걸고 벼랑을 탈 수 있었으며, 바다 속의 용까지 흠모한 것이다. 부인이 아름답지 않았다면 용에게 잡혀간 수로부인을 구하기 위해 여러 사람이 노래를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 '아름다움'에 육체가 쇠한 노인이 죽음의 결단을 서슴지 않고 여인이 원하는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천 길 벼랑에 올라가는 위험을 감수한 것이다.

노인이 그 어려운 일을 했으나 종자(從者)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름다움'의 진실한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한다. 실용적인 면에만 매어 있는 종자들은 도저히 미(美)를 알아볼 수 없으며, 아름다움을 알아 볼 수 있는 것은 위대한 인격을 소유한 어느 노인이나 바다 속의 용이나 노래를 부르는 민중인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풍부하게 경험한, 청년이 아닌 노인을 등장시켜 부인의 아름다움을 찾고자 한 듯하다. 이런 점에서 수로 부인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미모만이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이 외모의 아름다움과 조화를 이루었으리라. 여기에서 우리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노래는 『삼국유사』에 <해가사>와 함께 전하는데, <해가사>는 한역되어 전하고, <헌화가>는 향찰로 전해진다. 아주 간결하면서도 낭만적인 멋을 지닌 작품이라 할 수 있다.

7. 원가

 

物叱乎支栢史

秋察尸不冬爾屋支墮米

汝於多支行齊敎因隱

仰頓隱面矣改衣賜乎隱冬矣也

月羅理影支古理因潤之叱

行尸浪 阿叱沙矣以支如支

貌史沙叱望阿乃

世理都 之叱逸烏隱第也

믈흿 자시

가살 안달 이우리 디매

너 엇뎨 니저 이신

울웠던 나치 겨샤온대

달그림제 녯 모샛

녈 물결 애와티닷

즛사 바라나

누리도 아쳐론 뎨여.

뜰의 잣나무는

가을에도 시들어 떨어지지 아니하매

너를 어찌 잊겠느냐 말씀하시어

그 인격을 우러러 보았더니, 이제 당신의 변심이여

그것은 연못에 비친 달 그림자가

물결이 일면 사라져 버리듯

하찮은 일에 변모함이니

세상이 모두 그런 때로구나

변심한 왕의 마음을 원망하는 향가이지만, 잣나무의 영원한 푸르름에 반하여 인간 마음의 변덕스런 변화를 질타하는 내용도 아울러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약속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너무나 변하기 쉬운 상황 속에서의 인간이기에, 때론 서로의 믿으이 깨어져 상처를 받기도 한다.

신충의 마음을 담은 시가 잣나무를 시들 게 했다는 것은 표현의 과장이겠지만, 신충이 그만큼 굳은 신의를 중요시 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노래는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신의를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주는 작품이다.

이 노래 뒤에 '후구망(後句亡)' 곧 뒷구 2구가 없어졌다는 말이 적혀 있는데, <삼국유사> 편찬 당시에 후구가 이미 산실되었기 때문에 노래 끝부분에 '후구망'이라 덧붙여 기록한 것이다. 그래서 8구체만 남아 있지만 후구가 없어도 노래의 뜻은 짐작할 수가 있을 듯하다. 그 노래는 잣나무를 저주하거나 또는 효성왕을 원망하는 내용을 담기보다는 오히려 체념적인 가락이 서려있지 않을까 한다.

연못에 비춰진 달을 왕에게 비유함으로써 고매한 시상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데, 특히 비약법과 생략법 등을 대담하게 구사하여 노래한 특징이 있다.

 

8. 도솔가

 

今日此矣散花唱良

巴寶白乎隱花良汝隱

直等隱心音矣命叱使以惡只

彌勒座主陪立羅良

오날 이에 산화 불어

빠삷은 고자 너는

고단 마사매 명ㅅ 브리압디

미륵 좌주 뫼셔라.

오늘 여기 산화가를 불러

뿌리는 꽃이여, 너는

곧은 마음의 명을 받들어 심부름하는 까닭에

멀리 도솔처의 미륵님을 모시는구나.

이 노래는 하늘에 해가 둘 나타난 괴변을 없애기 위한 의식에서 불려진 것이다. 합리적 사고로는 해가 둘 나타나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두 해가 함께 나타났다'는 것은 사실의 기록이 아니며, 우회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천상계와 인간계의 대응관념으로 보았을 때, 해는 곧 왕, 군주에 대응된다. 하늘에 두 개의 해가 등장했다는 것은, 현재의 왕에 도전할 세력의 출현을 예보해 주는 것 내지는 가뭄을 예견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세력의 출현은 혼돈을 빚고, 그래서 이 혼돈을 조정할 행위가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이와같은 사회적 혼란을 조정하기 위하여 행해진 의식이 산화공덕이고, 이 의식에서 불려진 노래로 볼 수 있겠다.

시대상황이 어려운 난관에 부닥친 것이 분명한 이런 상황에서는, 신 즉 부처의 공덕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상당한 수양을 쌓은 인간이 욕심을 버리고, 꽃을 뿌리는 신심(信心)으로 미륵보살을 모시어 들여 이러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 노래는 미륵사상을 읊고 있는데, 소박한 한 떨기 꽃 속에 미륵의 대자대비를 바라는 마음은 곧은 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의 산화공덕은 순수한 불교적인 관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재래신앙의 차원에 불교의식을 수용한 형태를 보여준다.

 

9. 제망매가

 

生死路隱

此矣有阿米次兮伊遺

吳隱去內如辭叱都

毛如云遺去內尼叱古

於內秋察早隱風未

此矣彼矣浮良落尸葉如

一等隱 枝良出古

去奴隱處毛冬乎丁

阿也彌陀刹良逢乎吾

道修良待是古如

생사로

예 이샤매 저히고,

나 가다 말ㅅ도

몯다 닏고 가닛고.

어느  이른 매

이에 저에 딜 닙다이

 가재 나고

가논 곧 모온뎌.

아으 미타찰애 맛보올 내

도 닷가 기드리고다.

삶과 죽음의 길은

여기에 있으므로 두렵고

'나는 간다'는 말도

다 하지 못하고 갔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 저기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한 가지에서 태어나고서도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

아아, 극락 세계에서 만나볼 나는

불도를 닦으며 기다리겠노라.

신라 경덕왕 때의 월명사가 지은 10구체 향가로, 일명 <제망매영재가>라고도 하는데, 죽은 누이의 재를 올리며 미타 신앙을 호소한 불찬 추도가로, 현존 향가 중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10구체 향가의전형적인 모습인 3단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다.

불교의 아미타 사상을 바탕으로 고도의 비유를 통해서 인간 고통의 종교적 승화를 노래한 작품으로, 현존하는 향가 중 표현 기교와 서정성이 매우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숭고한 불교적 신앙심을 바탕으로 피안의 세계를 지향하는 신라 지식인의 의식 세계를 탁월한 표현과 서정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노래 전반에 무겁게 깔린 서정은, 사랑하는 누이의 죽음으로 인하여 삶과 죽음 사이에서 깊이 고뇌하는 작자의 슬픔과 애절한 그리움이다. 이것이 불교적 내세관을 통해 승화되고 있어 작품의 이미지를 더해주고 있다.

이 작품의 표현상의 묘미는 5행에서 8행까지의 비유에 있다. 같은 부모에서 태어난 남매 사이의 헤어짐을 한 가지에 났다가 떨어져 흩어지는 낙엽으로 표현한 것과, 젊은 나이에 죽는 것을 덧없이 부는 이른 바람에 떨어진 잎으로 비유하여 요절의 슬픔과 허무함을 감각적으로 구상화한 것이다.

이 노래는 구절구절을 읽어 내려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누이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허망함을 절절히 느끼게 하며, 이와 더불어 작자의 신앙심이 얼마나 깊은가를 느낄 수 있게 한다.

 

10. 찬기파랑가

 

咽嗚爾處米

露曉邪隱月羅理

白雲音逐于浮去隱安支下

沙是八陵隱汀理也中

耆郞矣貌史是史藪邪

逸烏川理叱積惡尸

郞也持以支如賜烏隱

心未際叱 兮逐內良齊

阿耶 栢史叱枝次高支乎

雪是毛冬乃乎尸花判也

열치매

나토얀 리

힌구름 조초 가 안디하

새파 나리여

기랑 즈 이슈라

일로 나리ㅅ 역

낭 디니다샤온

  좇누아져

아으 지 노파

서리 몯누올 화반여

구름을 활짝 열어 젖히매

나타난 달이

흰구름을 쫓아 떠나니 어디인가

새파란 강물에

기파랑의 얼굴이 비쳐 있구나

여울내 물가에

임이 지니시던

마음의 끝을 좇고 싶구나

아아, 잣나무 가지가 높아서

서리조차 모르실 화랑이시여.

신라 경덕왕 때, 승려인 충담사가 기파랑을 추모하여 지은 10구체 향가로 사뇌가의 대표작이다. 물음과 그 물음에 대한 답사 그리고 결사의 3단 구성을 취하고 있으며, 낙구의 첫머리에 '아아'라는 감탄사가 있어 10구체 향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기파랑의 드높은 이격과 이상, 지조를 기리는 것에 있어 한 마디도 직접 언급함이 없이 '달'과의 문답체를 빌어와 제9구에서 자연스럽게 사상을 응축시켜 놓았다. 처음에는 기파랑의 외모를 그녀 나가다가 점차 그 정신의 숭고함을 드러내는 기교를 사용하고 있다.

이 시를 읽는 독자로 하여금 눈을 감으면 문득, 천 년 전 어느 달밤 냇가 흰 모래 위에 홀로 우뚝 서서 멀리 아득히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무한한 동경과 머나먼 이상을 그리던 기파랑의 고고한 자태와 인격이 눈 앞에 선연히 떠오르게 한다. 기파랑을 만나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이노래를 통해 기파랑의 고매한 인격에 반하게 되고, 이 노래의 작자와 마찬가지로 '기파랑'을 흠모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찬기파랑가> 평설이라는 글에서 "사뇌가 14수 중에서도 누가 보더라도 최고의 걸작이라고 생각된다. 이 한 편의 지묘한 소식을 어찌 필설로 다하랴! 표현이 절절하다는 말은 이런 작품을 두고 이르는 것이다."라고 격찬할 정도로 이 작품은 서정성과 서경성이 어우러진 뛰어난 작품이다.

 

11. 안민가

 

君隱父也

臣隱愛賜尸母史也

民焉狂尸恨阿孩古

爲賜尸知民是愛尸知古如

窟理叱大 兮生以支所音物生

此 兮 食惡支治良羅

此地 兮捨遣只於冬是去於丁

爲尸知國惡支持以 支如右如

後句 君如臣多支民隱如

爲內尸等焉國惡太平恨音叱如

군은 어비여

신은 다아살 어미여

민은 얼한아해고 하살지

민은 다알 알고다

구믌다히 살손 물생

이흘 머기 다사라

이따흘 바리곡 어디 가려 할지

나라악 지니지 알고다

아으 군다이 신다이 민다이 하날단

나라악 태평하니잇다.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을 주시는 어머니요

백성은 어린 아이라고 한다면

백성이 사랑받음을 아실 것입니다.

꾸물거리며 구차히 사는 백성들

이들을 배불리 먹이고 다스려

이 나라를 버리고 어디로 갈 것인가 한다면

나라 안이 다스려짐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 것이면

나라 안이 태평할 것입니다.

신라 제35대 경덕왕에 충담사가 경덕왕을 위해 지은 10구체 향가로 잠요이며 치국의 노래이다. 이 작품에서 왕을 아버지에 신하를 어머니에 그리고 백성을 어린 아이에 비유하여 "각기 자신의 본분을 다하라"는 유교적 사상이 돋보인다. 임금과 신하와 백성이 각자 자기 구실을 다하면 나라와 백성 모두가 태평하리라는 정치 이념을 발전시켜서 유교적인 내용이 다분하다.

『논어』에 "임금은 예로써 신하를 부리고 신하는 충으로써 임금을 섬겨야 한다(君使臣以禮 臣使君以忠)"라는 말이 있다. 군신간에 서로 화합하지 않고 불화가 생기는 원인을 공자는 바로 예와 충성의 결여로 보았다. 물론 공자가 말한 것은 임금과 신하가 체면만을 내세워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 서로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거짓없는 태도를 말한다. 이 작품에서도 같은 뜻의 교훈이 담겨 있다.

이 작품에는 임금과 신하, 즉 국가의 도리가 담겨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안민가>에서 말하는 '사랑'의 정신이 망각된다고 할 때 헛된 물거품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12. 도천수관음가

 

膝 兮古召

二尸掌音手乎支內良

千手觀音叱前良中

祈以支白屋尸置內乎多

千隱手 叱千隱目 兮

一等下叱放一等 兮除惡支

二于萬隱吾羅

一等沙隱謝以古只內乎叱等賜

阿邪也 吾良遣知支賜尸等焉

放冬矣用屋尸慈悲也根古

무루플 고조며

굴 바당 모호누아

천수관음ㅅ 전아

비 두누오다

즈믄 손ㅅ 즈믄 눈흘

 노  더디

둘 업슨 내라

 그  고티누옷다라

아으으 나애 기티샬

노디  자비여 큰고.

무릎을 꿇고

두 손 바닥을 모아

천수관음 앞에

빌며 사뢰옵니다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 중에서

하나를 내 놓아 하나를 덜어

둘 다 없나니

하나만 그윽히 고쳐 주옵소서.

아아, 나에게 그 덕(德)을 끼쳐 주신다면

놓으시되 베풀어주시는 자비는 얼마나 큰 것인가?

신라 경덕왕 때의 희명이 쓴 10구체의 향가로, 분황사에서 눈을 뜨게 해 달라고 빌며 읊은 불교적인 노래이자 기도의 노래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관세음보살은 주로 일반 중생의 삶을 보호하는 일을 한다. 만일 한량없는 중생이 온갖 고뇌를 받을 때에 이 관세음보살의 일을 듣고 한 마음으로 부르면, 관세음보살은 곧 그의 음성을 듣고 고통 속에서의 해탈을 얻게 한다.

관음사상에 들어있는 "응현(應現)"과 "위난구제(危難救濟)사상"은 아들을 얻고자 빈다거나, 장님이 눈을 얻는다거나 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렇게 우주의 무수한 관음이 어느 때 어느 곳에서라도 나타나 사람의 기원을 들어주고 위난을 구제해 주며, 변화무쌍한 관음력을 구현하여 사바 세계의 실제적 보살로서 신앙되어 온 것이다.

이 작품은 기원의 노래인 동시에 눈먼 자식의 눈을 고쳐보겠다는 모성애를 포함하고 있는 노래이다. 이 노래를 통하여 우리는 어린 아들의 어조를 듣게 되는데, 사실은 어머니가 지은 노래로 어머니의 감정이 완전히 아들의 것으로 바뀌어 있는 것에 놀라게 된다 그만큼 다른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가 동반될 때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천 개의 눈을 가진 보살이여. 눈을 하나만 내 아들에게 주소서. 당신이야 눈 하나 주시는 것은 아주 쉽지만, 내 아이에게는 목숨만큼 중요하오리다.' 어머니의 슬프고 측은한 정성이 가슴에 저리도록 절실하게 느껴진다.

 

13. 우적가

 

自矣心米

貌史毛達只將來呑隱

日遠烏逸○○過出知遣

今呑藪未去遣省如

但非乎隱焉破 ○主

次弗 ○史內於都還於尸朗也

此兵物叱沙過乎

乎尸曰沙也內好呑尼

阿耶 唯只伊吾音之叱恨隱善陵隱

安支尙宅都乎隱以多

제 매

 모렷단 날

머리 미나치고

엳 수메 가고쇼다.

오지 외온 파계주

저플 즈 외 ㅼ 돌려

이 잠 디내온

됴날 새누옷다니

아으오지이맛 선은

안디 새집 외니다

제 마음의

참모습을 모르고 숨어 지내던 골짜기를

멀리 지나 보내고

이제는 살피면서 가고자 한다.

단지 그릇된 도둑떼를 만나

두려움으로 다시 또 돌아가겠는가?

이 무서운 흉기의 위험을 지나고 나면

좋은 날이 고대 새리라 기뻐하였더니

아아, 오직 이만한 선업(善業)은

어디 높으신 새집에 두고 숨어선 안됩니다.

이 노래를 통해 우리는 작자가 도적들이 알고 있을 정도로 시가에 능한 명성있는 사람이었으며, 향가 또한 도적들이 알 정도로 널리 불려지던 노래였음을 알 수 있다.

도적들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영재가 지은 이 노래의 뜻을 이해하고 감화되었다는 사실에서 신라의 말기의 상황은 어느 정도 학식있는 사람들이 섞여 도적을 이룬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죽음을 앞두고 태연할 수 있는 영재의 그 신념의 강인함과 그의 재치와 익살로 인하여, 도둑을 앞에 두고 능히 녹림의 군자로 설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에게 그토록 강한 신념을 부여하는 것은 어떠한 사실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현재의 행동이 값진 미래와 서로 통한다는 믿음에 기인하는 듯하다.

 

14. 처용가

 

東京明期月良

夜入伊遊行如可

入良沙寢矣見昆

脚烏伊四是良羅

二 兮隱吾下於叱古

二 兮隱誰支下焉古

本矣吾下是如馬於隱

奪叱良乙何如爲理古

 긔 래

밤 드리 노니다사

더러 자리 보곤

가리 네히어라.

둘흔 내해엇고

둘흔 뉘해언고.

본 내해다마

 엇디릿고.

서울 밝은 달밤에

밤깊도록 놀고 지내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래 내 것이다마는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오.

이 노래는 헌강왕대에 왕정을 보좌하던 처용이 밤늦도록 놀다가 집에 돌아오니 역신이 그의 아내를 범함을 보고 지어 부른 노래이다. 언뜻 외설적인 느낌을 갖게 하기도 한데, 전반부의 상황설정은 후반부에서 보여주는 처용의 태도를 부각시켜 신격화하기 위한 극한 상황 설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제 아내가 외간 남자와 자고 있는 것을 보고도 노래부르며 춤을 추며 물러간 처용의 태도에, 역신 스스로 잘못을 자백하고 물러나고 만다. 처용의 이러한 관용적인 태도는 이 노래의 절정을 이루며 처용의 초극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키게 된다.

이 노래에 대해서는 불교적인 해석, 사회·역사적인 해석 등 여러 가지가 분분하지만 축사(逐邪:사악한 귀신을 물리침)와 벽사진경(僻邪進慶:사악함을 물리치고 경사를 맞이함)의 노래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주술적인 노래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벽사진경'을 위해 신라에서는 처용의 가면을 대문에 걸어두는 풍습이 있다고 하니 당시의 풍속과도 연관이 있다 할 것이다. 또한 아무리 악신(惡神)이라 하더라도 즐겁게 하여 보낸다는 우리나라의 무속을 통해 한국인의 여유에 찬 생활의 예지를 엿볼 수 있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