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웹툰 연재 만화인 “실질적이고 객관적인 동화”에는 매우 재미있는 내용의 만화가 실려 있다. <백설 공주와 일곱 난장이>를 들은 아니는 그 텍스트의 주제를 매우 독특하게 뽑아낸다. “사과는 깎아 먹을 것”이나, “백설 공주는 평생 사과는 스스로 깎아 본 적 없는 더러운 부르주아”라는 식이다. 그 아이가 텍스트를 오독했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작가의 손을 떠난 텍스트는 결국 독자가 가진 배경 지식과 결합하면서 독자 스스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 내는 것이니까. 그러니 그 아이가 저렇게 일반적이지 않은 견해를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 아이를 탓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독자는 적어도 어떤 장르와 작가의 일정한 의미 맥락 안에서 텍스트를 읽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사설이 길었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 오늘 이야기해야할 드라마 <트리플>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트리플>과 관련된 오독(誤讀)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니까.
1화가 방영된 이후, <트리플>은 각종 연예 관련 기사와 블로그에서 뜨거운 감자였다. 논의의 주제는 단 한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과연 이 드라마는 피겨 스케이팅을 어떻게 그려내고 있는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되는 피겨 스케이팅을 소재로한 드라마이기 때문에 그것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논의의 그 출발부터가 잘못되어 있었다. 마치, 백설 공주 동화를 동화가 아니라 자본가와 노동자의 투쟁으로 바라 본, 이야기의 처음 시작에서 예로 든 만화 속 아이처럼 말이다. <트리플>은 트렌디 드라마다.
<트리플>은 어디로 보나 트렌디 드라마다. 드라마의 주제가 그러하고, 감독이 트렌디 드라마를 장기로 하는 감독이고, 작가가 그러하고, 출연하는 배우들이 그러하다. 그렇지만 그간 <트리플>은 피겨 스케이팅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채택했다는 사실 때문에 스포츠 드라마로 오해받아 왔다. 그리고 그 오해에는 제작진과 홍보팀의 태도에도 책임이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피겨 스케이팅을 그 드라마적 소스로 채용했을 뿐이지, 피겨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드라마가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은 1화에서부터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트리플>의 1화 제목은 “트리플 악셀”이었다. 그리고 매회 피겨 스케이팅과 관련한 용어들이 매회의 소제목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 제목들은 해당 회(回)의 주제를 드러내는 원관념으로 사용된 것이지, 본격적으로 그 기술 혹은 피겨 스케이팅의 상황에 대해 그리겠다는 의도의 소제목이 아니었다. 기왕 1화의 이야길 단락 초두에 꺼낸 김에 이것을 가지고 이야길 해보자.
1화는 트리플 악셀이란 소제목과 함께 시작하면서 운동회에서 장애물 달리기를 하는 “하루(민효린)”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그와 동시에 하루(민효린)의 나레이션으로 트리플 악셀이란 기술이 ‘아름다운 기술이지만 그만큼 실패할 확률도 높은 기술이며, 자신을 모두 내던지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 없는 기술. 자신을 모두 내던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라고 이야기한다. 이 나레이션에(이러한 하루의 나레이션은 극의 매회 초반에 등장한다) <트리플>이라는 드라마의 지향점이 담겨있다. 1화의 전체 내용을 요약하자면, 5년간 피겨 스케이팅을 그만두고 있었던 하루가 다시 피겨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 계기가 라이벌에게 트리플 악셀을 성공하는 모습을 보이겠다는 의지였다. 그리고 그것은 하루 인생의 “트리플 악셀”을 시도하는 것이 되었다. 하루는 트리플 악셀을 성공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과 피겨 스케이트를 다시 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가 단 한번이지만, 1화에서 피겨 기술 “트리플 악셀”을 성공하는 것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자신을 모두 내던져 아름다운 기술을 성공시키는 것이니까. 오로지 젊은 청춘만이 할 수 있는, 실패할 수도 있는 대단하면서도 무모한 도전을 성공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트리플>은 피겨 스케이팅과 트렌디 드라마의 접점을 찾는 무척 세련된 방식을 보여준다. 피겨 스케이트의 기술에 불과했던 트리플 악셀이 하루의 인생과 겹치면서 묘한 접점을 만들어내 피겨의 트리플 악셀이 아닌, 인생의 트리플 악셀을 만들어 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래도 당신이 ‘왜 하필 피겨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왜 피겨는 안 되는가?’라고 다시 묻겠다.
트렌디 드라마의 가장 큰 미덕은 현실적 문제들을 어떻게 거세해내고 주인공들의 사랑이야기를 아름답게 꾸며내는가에 있다. 그리고 <트리플>은 그 미덕을 실현하기 위해 피겨 스케이팅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둘의 접점은 매회 꽤 훌륭한 수준에서 그려지고 있다. 매회 매회 등장하는, 피겨 기술이나 상황을 가져온 소제목들은 그 해당 회에서 주인공들이 겪는 일들과 일치점을 잘 찾아내고 있다. 그리고 이 접점을 통해 그 청춘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트리플>이 단순한 트렌디 드라마였다면, 이 드라마는 “피겨 선수가 사랑하는 이야기”였을 뿐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트리플>은 -우리가 야구를 인생에 비유 하듯이- 피겨 스케이팅이라는 운동을 통해서 젊은 청춘을 형상화해 내고 있다. 이것은 무척이나 세련된 서사 기법이다. 피겨라는 원관념을 이용해 청춘을 형상화하는 드라마. 이것이 지금의 <트리플>이다. 그리고 앞으로 이 청춘들이 어떻게 관계 맺으며 서로의 의식 성장을 그려낼 지, 그때마다 어떤 피겨 스케이트 장면이 그려질지가 기대되는 드라마이다.
이것은 결국 트렌디 드라마이다.
덧. 트리플 악셀이 ‘아사다 마오’의 기술이라 일본 피겨를 찬양한다는 애긴 그만두자. 그것은 논리의 비약일 따름이니까.
덧. 이 드라마가 성추행을 조장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극중 윤계상과 하루를 짝사랑하는 쇼트 트랙 선수 때문인 듯한데... 성추행은 당하는 사람이 그것을 성추행으로 느낄 때 성립되는 것이다. 극중 민효린이나 이하나가 그들의 행동을 성추행으로 느낀 적이 있던가? 귀찮고 짜증나는 존재로는 느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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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주관적인 해석입니다. 개별 텍스트에 대한 이해는 읽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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